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커리어 환승기
비전공자 출신 개발자의 성공 신화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컴공 출신 개발자였던 나는 기획자가 되었다.
개발자 커리어를 놓아주기로 결심한 뒤로 3번의 이직에 성공했는데, 이직 과정에서 있었던 N번의 면접에서 백이면 백 나오는 단골 질문
왜? 어떻게?
개발자에서 기획자가 되셨어요?
이제는 준비하지 않아도 줄줄 말할 수 있다. 예상한 질문에 나는 여유롭게 웃고 답변을 시작한다. 내가 개발을 그만 두겠다고 각성(?)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일을 잘하는 개발자는 "성능 개선"과 "이슈 해결" 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리소스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게 하도록 하고 닥친 이슈를 어떻게 해결할 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잘 헤쳐나간다.
예쁘다는 칭찬보다 일 잘한다는 칭찬을 더 좋아하는 나, 그런데 나는 이걸 잘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떤 부분을 개선하면 성능 이슈 없이 잘 구현될까 보다 왜 이렇게 해야되는지 설득하고 구현한 내용을 설명하는 데에 시간을 더 많이 쏟았다. 소스 코드로 이야기하기보다는 글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았다.
기획에 대한 헛점도 잘 찾아냈다. 개발을 하기 위해 기획서를 검토한 것인데, 이 서비스를 런칭해야 하는 당위성이나 고객의 입장에서 시뮬레이션을 더 많이 돌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구현하면 이 케이스에서는 유저들이 들어올 방법이 없는데,
이 분들은 어떤 프로세스로 들어와야하나요?"
...이거 잘 될까요? 이 서비스를 이용할 예상 고객수가 어떻게 되나요?
시니어 위주의 연차가 높은 직원이 많은 회사에서 2년 남짓의 경력을 가진 사회초년생이였던 나에게 기획 팀장님께서는 '숙제검사 받으러 온다' 라는 표현을 하셨을 정도로 기획서를 꼼꼼하게 검토했다.
한번 짠 코드는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슈 상황을 정리한 메일이나 방향을 제안하는 메일은 이미 보내고난 뒤에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고 있었다. 스스로 회고까지 하면서 말이다.
'아..이렇게 보내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다음엔 이렇게 해봐야지!'
그때 당시의 나는 누구나 인정하는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였는데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피드백도 많이 들었다. 개발을 하는데 효율성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마음은 기획자로, 몸은 개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총 4년 간의 컴공 경력을 써먹은 뒤 개발자 커리어를 종료했다.
이직이 결정 된 후 사람들은 나에게 여태까지 배운 게 아깝지도 않느냐고 물었다. 전-혀요.
앞으로의 커리어가 너무 설레고 기대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