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마음이 외려 힘이 될 때
다시 글을 씁니다.
2016년쯤, 학과 후배의 소개로 처음 브런치에 가입하고 글을 썼다. 늦은 졸업을 앞둔 스물여덟이었고, 아직 작가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기대어 지내던 문학청년이었다. 글쓰기 전략이나 책으로 집필될 기획 같은 건 고민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서툴게 내뱉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보다 글을 써서 누구에게든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실망스러운 피드백이 괴로워도, 공모전에 수십 번 낙방해도, 내가 쓴 글이 돈이 되지 못하고 내가 들인 노력이 시간의 영수증이 되지 못해도, 어쨌든 썼다. 당시 8년 동안 곁을 지켜준 애인도 그런 나의 치기 어린 열정을 응원해 주었다. 성큼 다가오는 서른과, 변변한 직업의 필요성과, 막연한 결혼 계획을 못 본 체하며 글쓰기에 몰두했다. 지금에 와서 그 시절이 온당했는지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넉넉지 못한 형편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응답 없는 희망을 믿었다면, 수시로 말을 걸어오는 절망과도 한 번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과거에 매몰되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전에, 이후의 삶을 속도감 있게 축약하자면 이렇다. 직업적으로 불안정했으나, 적어도 글 쓰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프리랜서로 칼럼을 썼고, 1권의 시집과 2권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라디오 작가였다가, 국어 강사였다가, 대입 자기소개서와 면접 컨설턴트였다가, 지금도 패션 브랜드의 카피라이터로 활동한다. 물론 그 사이에 택배일도 했고, 카카오메이커스에 입사했다가 3개월 만에 퇴사하기도 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8년을 만났던 애인은 이후 3년을 더 곁에 머물다가 아내가 되었다. 우유부단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를, 단호한 마음과 여린 표정을 지닌 여자가 잘 이끌며 살고 있다. 대출의 힘을 얻어 집도 마련했고, 중고로 작은 차도 구입했다. 또래에 비해 돈을 많이 벌진 못하지만 부족한 대로 욕심부리지 않고 살고 있다. 그리고 서른여섯이 되었다.
글로 적고 보니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 그런데 요즘은 늘 마음 한 구석이 건조하고, 잔잔한 불안과 결핍이 일상에 찰랑인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 SNS를 도배한 '경제적 자유'를 얻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만큼 물질을 베풀고 싶고, 내가 원하는 취향을 구입하고 싶다. 그러기에 나의 글은 저렴하고 소박하다. 그 간극에서 빙빙 돌다가, 결국 '나는 글쓰기로 성공하지 못했다.'라는 자괴감의 늪에 서서히 빠져 들어간다. 규칙적인 운동 덕분에 당장의 우울은 면했으나, 반복되는 일상 속 제자리걸음이라는 답답함은 벗어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친 마음이 선명했다. '번 아웃',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느 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몰아붙일 만큼 무엇에 골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신, 헌신, 그런 느낌마저 희미하다. 회사의 일은 내 책임을 다하며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잘해보려는 정도였다. 카피라이팅 업무에는 진심을 다하긴 했지만, 들이는 시간과 받는 고료 사이의 균형을 자주 고민했다. 가성비를 따지는 행위를 투신이나 헌신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브런치에 썼던 글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쓰고 싶어서 썼던 초심과 달리, 어느 순간 '출간 제안'이나 '공모전 당선'을 목적으로 전략적이고 계획적인 글만 쓰기 시작했다. 출판 시장의 경향을 고민하고, 지난 회차의 공모전 당선작들을 분석하고, 나름의 틀에 맞춘 글들을 적었다. 그러면서도 전략이나 계획을 세우지 않은 척하려 했다.
내가 발견한 나의 '지친 마음'은 그 모든 계획과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팔릴 이야기를 하려고만 고민했던 것. 그러니 팔리지 않으면 글을 써야 할 동력을 잃었다. 내가 쓴 글이지만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었고, 그러니 귀중하지 않았다. 귀중하지 않으니 자신이 없었고, 글을 쓴다는 행위만으로 뿌듯했던 지난날의 자존감도 없었다. 결국 온전히 나를 위한 글을 쓰지 않게 되었고, 글로 돈을 버는 중에도 다리 하나가 부러진 의자처럼 작은 외력에도 자주 휘청이고 넘어졌다.
'지친 마음', 그 마음을 품고 사는 것에도 그만 지쳐버렸다. 이제 '나의 글'을 써야겠다. 어떤 주제일지, 어떤 독자를 겨냥해야 할지, 어떤 장르일지 불분명하지만 나의 글이라는 점만은 분명한 글을 써야겠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브런치에 글을 썼던 것이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1년 사이, 나는 많이 지쳤고, 그 덕에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누구든 읽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