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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Jun 16. 2022

문의 바깥에서라도

다시 만나 웃을 수 있다면

누군가의 허망한 사망 소식을 장소와 시간과 사망자 수 따위로 확인할 때면, 삶이 한 번뿐이라는 게 참 야박하게 느껴진다. 나도 불멸 영생을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죽고 나서도 한 번쯤, 딱 한 번쯤은 다시 살아볼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다. 목숨에 경중을 따질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이 더 애가 쓰이는 사람들이 있다. 억울하게 살해된 피해자들, 천재지변에 손도 못 쓰고 숨을 거둔 사람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2002년 연평해전 6명의 사망자와 2014년 4월 16일 들이치는 바닷물에 속수무책이었을 세월호의 학생들까지. 구구절절 읊자면 끝도 없겠다.    

  

그런가 하면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언젠가 죽게 된다면 꼭 다시 살아볼 기회가 생겼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나의 부모님.      


부모 중에서도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가 있을 것이고 자식에게 더 많이 해준 부모, 해주지 못한 부모가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 서로 비교하자고 들면 끝도 없다. 자식을 학대하고 저 죽는 길에 어린 자식을 끌고 가는 파렴치한이 아니라면, 모든 부모는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식을 키웠을 것이다. 심지어 모든 순간이 최선이 아니었다 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겨우 어른 팔뚝 크기밖에 되지 않는 아이를 낳아 장성할 때까지 먹이고 재우고 가르쳤다. 그 정도면 할 만큼 한 것이다. 부모의 입장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자식으로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부모님도 할 만큼 하셨다. 먹일 만큼 먹이고 입힐 만큼 입혔다. 가르칠 만큼 가르쳤고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돈을 줘가며 나를 키웠다. 당연히 부모님께 감사하지만, 사실 자식은 부모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부모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부모가 겪어야 했던 ‘어떤 일’들은, 어쩌면 자식에겐 죽을 때까지 그저 ‘어떤 일’로만 남는다.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낳아 기른 은혜를 다 갚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태 자식으로만 살아본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매우 이르고 비겁하지만, 벌써부터 나는 이런 바람을 갖는다. 언젠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들이 다시 한번쯤 살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첫 번째 삶의 기억을 가지고서 다시 한번 더 살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분이 또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도 좋고, 각자의 전혀 다른 삶을 살아도 좋겠다. 아들 둘을 낳아 길러봤으니 이제 딸을 낳아 길러봐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론 자식 같은 건 낳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자식 같은 걸 낳지 않으면, 부모 같은 건 되지 않을 테니까. 부모라는 그 가늠할 수 없는 기쁨과 절망과 시도와 오해와 고난들을 모르고, 혼자 앓으며 우는 밤도 모르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평생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부모의 입장은 알지 못한 채로.    

 

그러나 삶은 고작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는다. 마치 한 번 닫히면 다시 열 수 없는 문과 같다. 얼떨결에 태어나 문은 열렸는데, 내 의지대로 다른 문을 열어볼 수도 없고, 문이 닫히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볼 수도 없다. 문이 빨리 닫히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양 아등바등 살다가 겨우 한 뼘쯤 남았을 때,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고, 어떤 행복은 참으로 사소하고 쉬웠으며, 삶은 열리고 닫히는 것보다 더 값지다는 걸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깨닫는다. 곧 문이 닫히고 한 사람의 생이 끝난다.   

  

우리는 문의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소중한 것들은 모두 문의 안쪽에서 빛나는 걸까. 우리는 왜 문을 버티고 서서 바깥으로도 안으로도 성큼 발을 내딛지 못하는 걸까. 왜 삶은 최선을 다해도 후회가 남는 걸까.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또 언젠가 죽게 될 우리를 떠올리며 나는 문의 바깥을 상상했다. 그곳은 저승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음 생일 수도 있겠다. 그곳은 이번 생의 전부인 줄 알았던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곳일 테다. 어떤 회한과 원망도 무용한 곳, 어떤 그리움과 미안함도 이해받을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문의 바깥에서라도 우리가 만나 웃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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