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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Jun 16. 2022

기억 보관법

잃을 수는 있지만, 잊을 수는 없는

기억 보관법     

새벽녘 흰 여우 울음소리
귓바퀴에 묻히며 잠들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낙서
지우려 문지를수록 되려 기억이 묻어
세 들어 살던 벽돌집 여태 선명하고
좁은 방 무릎 세워 앉아 울고 웃던
우리 자리에 기억의 온기가 여전합니다    

묻어두고 싶은 기억은 묻어두려 애쓸수록
찌개 국물처럼 하필 손 닿지 않는 곳에 튀고
당신 그때 내게 꼭 그래야만 했던 거냐
따져 묻고 싶다가도 곰곰이 새벽이 오면
서로 기억을 묻히고 사는 처지에
구태여 원망을 덧칠하지 말자 그랬습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마술은 늘
콧기름을 묻히며 완성되곤 했는데
손 안의 동전이 사라지거나 나타나듯
내게 묻은 기억과 내가 묻힌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이룬 셈입니다    

투명할 수 없으나 언제나 선명하게
기억을 보관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의 아버지는 삼계동에서 여우 농장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화장실도 없는 허름한 집, 너른 앞마당에는 여우 우리가 줄지어 있고 기백 마리의 여우들이 칸칸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함박눈 내리는 겨울이면 흰 여우의 털은 더 희게 물들어 눈동자들이 유난히 더 반짝였다고 한다. 나도 분명 그 집에서 나의 부모와 기백 마리의 여우들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 여우의 모습은 없다. 마치 포토샵으로 앞마당에서 여우의 흔적들만 말끔히 덜어낸 것 같다. 여우와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여우의 존재를 믿는 건, 겨울이면 여우 목도리를 두르던 할머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여우들이 당시 우리 가족의 생계를 버티게 해주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새벽녘 구슬피 멀어지던 여우의 울음소리를 내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때로 기억은 소리의 형태로 귀 언저리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8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삼계동의 여우 농장을 접고 초등학교가 있는 내동으로 이사했다. 전세로 들어간 집은 학교 담장 바로 옆 벽돌 주택 1층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쉽게 누군가를 좋아했다가 쉽게 마음이 식었고, 잘 지내다가 이유 없이 멀어지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느 날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골목으로 난 벽에 화이트로 적힌 낙서가 눈에 띄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고, 사실이라 해도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고, 어쩐지 엄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우리 집은 학교 담장 바로 옆이라 내일이라도 온 학교에 소문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지우개로 박박 문지르고 플라스틱 자로 긁어내며 낙서를 지웠다. 오히려 그렇게 지우려 애쓴 탓에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더욱 선명하다.      


결혼을 준비하며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아내와 나는 투룸에서 함께 지냈다. 우리는 자주 안방 침대와 TV 사이 좁은 공간에 무릎을 세워 앉아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나의 아저씨>와 <미스터 션샤인>을 보며 웃고 울었다. 겨울엔 캐럴을 들으며 어깨를 들썩였고 자주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미래를 다짐하고 과거를 후회했으며 언제나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엉덩이가 겨우 들어앉을 반 평도 채 되지 않는 그 공간이, 좁은 투룸에서 가장 따듯했다. 우리가 그 자리에 묻힌 기억, 또 우리에게 묻은 기억 덕분이다.   

  

기억은 어쩌다 잃을 수는 있어도 일부러 잊을 수는 없다. 잊으려 애쓰는 만큼 선명해지고 만다. 잃을 때까지 몸과 마음에 덕지덕지 묻히고 사는 수밖에 없다. 기억을 보관한다는 건 존재와 별개인 어떤 상자에 기억들을 담는 일이 아니라, 존재에 기억을 묻히고 사는 일에 가깝다. 어떤 기억은 눈빛과 손짓이 닿지 않는 곳에 묻어서 자연스레 잊게 되고, 끝내 잊을 수 없는 어떤 기억은 다른 기억으로 덧칠되어 흐릿해진다.   

  

결국 나는 기억 덕분에 색과 형태와 표정을 갖게 된 존재 아닐까. 덧칠된 기억들만큼 다양하고 선명해지는 게 아닐까. 기어코 살아내는 일만이 유일한 기억 보관법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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