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공정과 상식’
깨어있는 감시자
김 선생(배역: 최민식)이 부임해 오기 전까지, 엄석대가 맘껏 누리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겪어야 했던, 이상한 그 모든 현상의 근원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누군가의 탓'이다.
교권을 가졌던 최 선생(배역: 신구), 그는 자신이 2년간 담임을 맡았던 학급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갓 부임해 온 김 선생이 첫날부터, 또는 고작 며칠 만에 알아챘던 많은 것들을, 2년이나 담임하는 동안 최 선생은 전혀 몰랐다.
최 선생의 잘못은 너무나 크다.
직무를 유기한 것이고, 한없이 무능했다. 그것이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에서, 한 명을 제외한, 반아이들 전체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시험 때마다 엄석대에게 시험지를 빼앗겨왔던 세 사람을 호명하고 체벌한 후에, 김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 몫을 뺏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또 불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어. 그런 너희들이 앞으로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
엄석대가 지배하던 학급을 바꾼 것이, 어떤 대단한 혁명,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만 새 담임 선생님이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시작한 것, 그것뿐이었다. 김 선생이 한 일은, 어쩌면 깨어있는 민주시민의 역할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엄석대
실생활에서 나에게 엄석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을 단 하나만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검찰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하면, 언제나 검찰이었다. 언제나 힘이 있었고, 권력의 향방엔 누구보다 기민하여, 항상 더 힘 있는 편에 섰다. 권력자와 재벌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면죄부를 선물했다. 또한 권력자들의 충직한 칼이 되어, 누군가의 목을 치고, 팔다리를 거침없이 잘랐다. 약자들에게 그 가혹함이란 이를 데 없었다.
정의의 가면을 쓰고, 약한 자에겐 떼로 달려들어 산 채로 물어뜯지만, 재벌과 권력자들에 대해서는 수사든 기소든 제대로 하는 법이 없다. 전현직을 가리지 않는 제 식구 감싸기는 도를 넘고, 한계가 없다. 특히 검찰 고위간부 출신에게는 부끄럼 하나 없이 꼬리를 내린다.
검찰 출신이 대통령이 된 후,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나라를 ‘검찰공화국’이라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검찰이 장악한 이 나라는, 이미 공화국이 아니다. 검찰의 수장이 왕좌에 오른 '검찰제국'이다.
수십 년을 이어왔던 무소불위의 검찰이 처음으로 약간의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집권 내내 '검찰개혁'에 매진했던 문재인 정부 때다. 그러나 모두들 알다시피 그 개혁은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영화에서 한병태가 했던 모든 시도들이 실패했던 것처럼, 문정부는 검찰총장의 직속상관인 법무부장관을 앞세워 지속적인 검찰개혁을 시도했지만, 박상기(65대), 조국(66대), 추미애(67대), 박범계(68대)까지... 모두 실패하였다. 개혁의 칼은 무뎠고, 답답하기만 했다.
뒤집기
'뒤집기'는 씨름 기술의 하나이고, 궁지에 몰린 듯했던 쪽이 오히려 한순간에 승리를 가져가, 반전의 쾌감까지 주는, 씨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멋진 기술이라, '씨름의 꽃'으로 불린다.
그러나 나에게 최고의 뒤집기 기술을 선보인 것은, 씨름선수가 아니라, 검찰이다.
검경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약칭: 공수처) 설치, 검찰총장 직무정지와 징계 등으로 해서, 검찰이 힘을 잃고 궁지에 몰리나 싶었지만, 한순간에 판을 뒤집은 그들의 기술은 놀라웠다.
그 기술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응징하러 오는 놈, 더 나쁜 놈 만들기"였다.
그들 조직은 전사적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하고, 언제나 손발을 잘 맞춰온 언론의 전폭적 조력을 더해, 그것을 해냈다. 조국을 멸문지화 했고, 추미애를 정의로운 검찰을 억압하는 부정한 상관으로 만들며, 자신들은 온전히 살아남았다. 검찰의 기술과 언론과의 협업은 너무도 현란하여, 이때에 깜박 정신줄을 놓아버린 시민들이 많았다.
악을 단 칼에 제거하지 못하면, 반격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는, 뼈저린 교훈만 남았다.
우리들의 끝나지 않은 5학년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신임검사가 검사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는 선서라고 한다.
좋은 단어로 가득한 멋진 말이지만, 읽는 순간 몰려드는 공허함이 그지없다.
저렇게 선서를 할 당시, 검사들은 가슴이 잠시 벅차올랐을지 모르겠으나, 저 다짐의 지속시간은 얼마나 되며, 퇴임 때까지 여전히 저 상태인 감사가 단 1% 라도 되는지는, 무척 의문스럽다.
영화에서, 이미 어른이 된 한병태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렇다
"내가 사는 오늘도 여전히 그때의 5학년 2반 같고, 그렇다면 그는 어디선가 또 다른 급장의 모습으로 5학년 2반을 주무르고 있을 거다."
이 말이 맞다.
현재 우리도 5학년 2반과 다를 바 없다. 아주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엄석대가 모든 것을 누린다. 어떤 사람들은 5학년 2반 학생들 같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교무실 선생님 같다. 어떤 이들은 당하고, 어떤 이들은 침묵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길고 긴 우리의 5학년이 끝나서,
공정과 상식, 법과 정의, 명예와 사명, 인권과 봉사를 입에 달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그들에게,
각성한 5학년 2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온 국민이, 함께 시원하게 외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
이야기 속 엄석대는 김 선생에게서 제대로 응징을 당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나름 전래동화 같은 사필귀정, 권선징악의 결말을 맞았으나, 우리 사는 세상에서는, 거짓의 '공정과 상식'을 운운하던, 엄석대가 교장선생님이 되어버렸다.
역시 현실은 언제나 책 보다, 영화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
우리에게도 6학년의 시간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 反擊(반격) <완결>
※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은,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 에서,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대배우 최민식의 젊은 리즈시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링크 : https://youtu.be/De0 ZkC1 mCxc? si=XF9 kixGiejjibG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