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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Aug 23. 2022

결심을 위한 결심, 영화 [헤어질 결심]

마침내, 완전히, 붕괴한 사랑


1.

영화 곳곳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은 박찬욱 감독의 전작을 되짚으려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던 내가 무심코 닮은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해준(박해일)이 기도수의 사고 현장이던 그 봉우리를 수완(고경표)을 매단 채 거꾸로 올라타는 장면이라던가. 그리고 이 장면에서 느낀 기시감은 '아가씨(2016)'보다는 '친절한 금자씨(2005)'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이미지 출처 | IMDB

2년 전에 보고 절대로 다시 손이 가지 않던 친절한 금자씨 속 무언가를 땅에 질질 끌고 가던 금자의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이 영화가 이전의 박찬욱 영화와는 다를 테지만, 어쩔 수 없는 박찬욱 영화라는 점이 내 머리에 각인되었다.



이 느낌이 영화에 방해가 된다기보다는 '아가씨(2016)'에서 어느 한 지점을 두고 빠르게 급물결을 타며 사랑과 서스펜스를 줄타기했던 것처럼 같은 사랑이어도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는 그들의 영화였기에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그저 흥미로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흥미로움은 오프닝 타이틀의 부서지고 깨어지는 화면에서 들려오는 어떤 깨지는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증폭되었다.


2.

책상의 너비는 그대로 둔 채 그들의 마음은 들쭉날쭉 거리를 좁힌다. 


남편의 사망에 대한 설명을 사진으로 할지 말로 할지 고르라는 해준의 말에 선택지를 받은 서래(탕웨이)가 사진을 선택했을 때. 정갈하게 담긴 스시 도시락을 마주 앉아 먹은 후 빠르면서도 정확하게 취조 책상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식사 후 따라 나오라는 말을 하곤 해준이 서래가 들고 있는 칫솔에 치약을 짜주면서. 


남편의 사망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조사하며 앞에 둔 책상과 경찰서라는 장소는 같은데 그들의 거리는 빠르게 편집된 화면처럼 자꾸 좁아져 결국 거리라는 것이 사라지고 만다.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나오는 그 진술 장면은 어떤 특수 효과 없이 오로지 편집으로만 표현했다고 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이 빠르게 교차하는 장면은 그들의 눈이 서로만을 향하고 서로만을 교차하여 관객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버린다. 관객들은 이때부터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어 온전히 그들에게 집중한다.


3.

마침내, 완전히, 붕괴한 사랑. 서래는 휴대폰을 꺼내 '붕괴'라는 두 글자를 검색한다. 


무너지고 깨어짐. 붕괴의 사전적 정의이다. 


예상치 못하게 와장창 무너지고 깨어지며 영화의 제목 ‘헤어질 결심’이 등장하는 오프닝 타이틀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사랑한다는 말이 그 어디에도 없었던 그들의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먼저 읽은 건 서래였고, 그 문장은 대체되어 사용될 수 있음을 해준은 만조가 찾아왔을 때야 마침내, 비로소 깨달았다. 서래가 붕괴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해본 순간, 서래의 집을 나선 해준이었고 그렇게 그들의 교차는 만남에서뿐만 아니라 헤어짐에서도 일어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4.

그들의 교차는 만나고 헤어지는 마음뿐만 아니라 사물에서도 일어나는데 스마트 워치를 항상 손목에 두던 해준이 이포로 온 이후부터는 그의 손목에서 더 이상 스마트워치를 볼 수 없다. 반면, 이포에서의 서래의 손목에는 해준의 손목에 항상 있던 그 스마트 워치가 자리했다. 그리고 그가 항상 녹음을 할 때 사용하던 그것을 사용하여 그에 대한 마음을 마치 그의 행동을 따라 하듯 담아내기 시작한다. 서로의 습관 곳곳에 서래의 향수처럼 깊이 뿌리내린 냄새가 스며드는 이 영화는 '화양연화' 속 계단의 교차하듯 얽히듯 서로를 지나치는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5.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산’ 이야기에 더 눈길이 갔다. 산과 바다로 챕터를 나누어둔 '친절한' 이 영화는 먼저 첫 번째 챕터의 ‘산’ 이야기에서 서래와 해준의 만남을 펼쳐둔다. 공자의 말을 따라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서래의 번역기 말에 짧게 "나도."라고 답하던 해준이었기에. 산에서 시작되어 산에서 끝난 첫 번째 챕터는 꽉 막혀 더 이상 건들 수 없는 완벽한 이야기로 내게 다가왔다.


영화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또 보았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보다 보니 꽉 막혀 끼어들 틈 없이 완벽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산’ 이야기를 지나 어째 시작부터 끝까지 고통만이 가득한 두 번째 챕터 ‘바다’ 이야기에 온전히 마음을 다 쏟았다. 빠르게 차올라 소용돌이를 만드는 파도처럼 빠르게 흘러가며 헤어짐으로 시작해 헤어짐으로 끝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마음이 아리고 쓰렸다. 소름 끼치게 빠져드는 바다의 회오리는 마음을 짓눌려 죽였고, 서래가 챙긴 긴 막대기가 둥둥 떠다니는 그 지점 가까이까지 다다른 해준이 휴대폰에 저장된 녹음을 다시 눌러들을 때 카메라가 빠르게 내려가며 로우 앵글숏으로 변하여 그에게서 온갖 허망함과 절망과 괴로움을 모조리 느끼며 또다시 마음을 짓눌려 죽였다.



6.

소용돌이를 또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아본다. 애써 참으며 헤어질 결심을 생각하다 보니 해준의 부인이자 원자력 발전소의 연구원으로 등장하는 정안(이정현)이 문득 떠오른다. 처음에는 한없이 가볍다고 생각했던 캐릭터였다. 흘려보내는 단 10초의 시간도 없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 어설프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조금 더 보고, 더 많이 생각하다 보니 정안은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알았다. 그의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가 끼워 맞추어 놓은 퍼즐이 정안의 말대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7.

다시 '결심'으로


결심을 하기 위해 반드시 수반되는 결심들이 있다. 영화는 그냥 결심과 결심의 '연결'만 쫓을 뿐이다. 감독의 말대로 숨겨둔 결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난 그냥 결심으로 이어지는 어떤 '결심' 같은 것들에만 집중했다. 시작은 나 자신을 속일지라도 헤어짐에는 결심이 필요한 것인가. 그들의 결심은 헤어짐을 위해서, 내가 일단 살기 위해서, 그를 살리기 위해서,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결국 헤어짐의 결심을 한 모든 이들에게서 상실의 고통을 보게 하고 그들의 상실을 보며 개인의 깊은 마음속 자신만이 아는 혹은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상실을 건드려 마음을 으스러뜨린다.


결심은 생각의 아주 꼬리 부분이라 결국 삐죽 드러나고 만다. 마침내, 드러나는 결심들. 결심은  다른 결심을 낳아 해준과 서래의 ‘선택 만들었다


결심을 위한 결심을 고통 속에 드러내고 서로를 붕괴시키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게 만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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