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삶을 경청하며
출판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받은 투고였다.
오래된 연습장에 비뚤거리고 서툰 글씨로 또박또박 적어나간 어느 85세 할머니의 시노트였다.
뭔가 대단하지 않은 일상의 생각들을 기록한 그 낡은 노트를 읽으며 무언가 묘한 감성을 느꼈다.
노트를 전달해 주신 분은 예전에 강의를 진행했던 도서관의 관장님이셨는데, 이미 등단도 하셨고 여러 차례 상까지 받은 시인님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일정을 잡고 만나 뵙기로 했다.
안양역 앞에서 만나 함께 탄 차에서부터 본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6.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법도 질서도 없이 사람들이 죽고 잡혀가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무서워서 학교도 못 다니셨다고 했다. 학교를 갈 수 있을 땐 또 줄줄이 달린 동생들 챙기느라 못 갔다고 하셨다.
지금 같으며 초등학생정도밖에 안 되었을 어린 소녀의 75년 전 이야기였다.
결국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70세가 넘으셔서 비로소 한글을 배우셨다고 했다.
그동안에는 글을 읽고 싶어도 못 읽고 배우고 싶어도 못 배웠던 한이 맺혀있어서일까.
그렇게 재미있더란다.
시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총기가 뛰어나신 분이었다.
그 시절 만약 기회가 닿아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면 크게 되시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떠난 남편과 친한 친구에 대한 그리움에 편지도 쓰셨다고 한다.
"여보 당신 백년가약 맺고 살자 하더니 그 약속 버리고 훌쩍 떠난 당신이 야속하오.
당신은 지금 저 구름 타고 여행 다니지요 나는 이 세상 얽히고설킨 문제 풀다 보니 80이란 종점까지 와버렸소. 이제는 모든 것 다 잊고 책을 벗 삼아 공부하오.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 데 갈 때는 베옷 한벌 얻어 입고 가는데 왜 이리 복잡한지요. 올 때는 부모님 초대받아 왔지만 갈 때는 천사 따라가서 저 하늘에 벙실 벙실 피어오르는 구름 속에 살포시 앉아 바람 따라 여행하면서 이 세상 내려다보면서 시 한 편 읊어보고 싶소.
그때까지 변치 말고 고대하고 계세요."
그저 담담히 적혀있는 글들이 이상하게 마음을 때린다.
무슨 대단한 말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속에 그녀의 삶이 있기 때문일까.
삶이란 반드시 끝이 있건만, 심지어 그 끝에 누가 먼저 도착할지 아무도 모르면서
그저 바쁘게만 살아온 삶의 굽이치는 물결들을 돌아보게 된다.
누가 시인인 줄 알까 싶은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렇게 한참 들었다.
그리고 2권의 노트를 더 건네주셨다.
언제 시집으로 나올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씀드렸다.
연필로 눌러쓴 시들을 문서로 옮기고, 책에 실을만한 것들을 고르고, 주제별로 나누고,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문득 책을 낸다는 건 결국 삶을 담는 일임을 깨닫는다.
나는 과연 그녀의 삶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까?
또 그렇게 담아낸 삶은 또 어떻게 전달 수 있을까?
책의 무게보다 더 큰 삶의 무게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