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능력주의의 폭정) - 마이클 샌델
한 줄 평: 능력주의의 결과는 오만을 낳는다. 성공은 운이니 겸손해져라.
책에 흥미를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허영심에 읽었던 책이 하나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내 브런치를 찾아보니 처음 책 리뷰를 올린 게 바로『정의란 무엇인가』이다. 2016년 10월에 리뷰를 썼으니 약 4년 3개월 전이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난 뭘 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 생각은 일단 접어두자.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기억나는 거라곤 기차 딜레마 밖에 없다. 지금보다 문해력이 훨씬 부족했기 때문에 억지로 겨우겨우 읽은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내 문해력이 4년 전보다 훨씬 좋아진 건지 아니면 공감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책을 다 읽어 본 결과 각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지만, 이 책의 핵심만 읽고 싶다면 <5장 성공의 윤리>만 읽으면 된다. 한 장 더 읽는다면 <6장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까지 읽으면 된다. 최고의 석학 마이클 샌델이 쓴 책이라서 어렵고 따분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쉽게 잘 읽힌다. 주장하는 바도 명확하다.
먼저 능력주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해보자. '~주의'가 들어가면 단어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는데 '주의'를 '최고로 여기는 사상'이라고 풀어서 보면 된다. 능력주의를 그렇게 해석해보면 능력을 최고로 여기는 사상이라는 뜻이 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얼추 맞는 말이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보겠다. 능력에 따른 성과 배분이 정의롭다는 생각이 능력주의다. 여기까지 말하면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게 뭐가 잘못이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보통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기회의 평등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또 능력 있는 사람이 그 능력에 맞게 소득을 얻고 있는지를 얘기한다. 만약 기회가 평등하고 능력에 따른 분배가 잘 이루어진다면 능력주의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는 정의로운 사상처럼 느껴진다.
'개천에서 용 난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말이 능력주의를 뜻하는 말이다. 소수의 사람만이 자신의 부모보다 더 잘 살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매스컴에 나와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찬양받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일 뿐이다. 오히려 미디어에서 이런 사람들을 다루면서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인식을 준다. 더불어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나는 재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아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야'라고 자책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샌델이 이 책에서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기회의 평등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않은지가 아니다. 가정이긴 하지만, 어찌어찌해서 기회의 평등이 완벽하게 지켜진다고 해보자.(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그러면 더 심각해질 문제가 있는데 샌델은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 문제는 바로 불평등이다. 기회가 평등하면 그 기회를 살릴 재능을 갖추고 노력을 한 사람이 부자가 될 것이고, 사회에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직업에 알맞은 재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기회가 평등했기에 모두가 자기가 받을만한 걸 받았다고 여긴다는 거다.
이게 왜 문제냐고? 성공한 사람은 '나는 내 재능과 노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어. 나는 자수성가한 거야. 그러니 내가 누리는 건 내가 누릴만한 것들이야.'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더불어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자들을 보며 '저들은 재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거야. 그들은 그들이 누려 마땅한 걸 누리고 있을 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건 성공한 사람뿐만 아니라 실패한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은 거만해지고, 실패한 사람들은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왜냐하면 각자 받을 것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 실패한 사람을 도울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공동체적 연대는 약해진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 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37p)
교회에서 간증을 할 때도 성공한 사람들이 섭외된다. 이것도 능력주의의 일환이다. 어쩐지 그들의 간증을 들을 때면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나도 하나님 잘 믿으면 성공할 수 있어! 나도 하나님 잘 믿으면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어!'라는 말도 안 되는 동기부여를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가기 마련이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해서인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현실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한테 버림받은 건가?
그런데 성경을 조금만 읽어봐도 위의 생각은 오해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시편을 비롯해서 성경 여러 부분에는 '뿌린 대로 거둔다' 혹은 '인과응보',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말씀이 있다. 욥기만 봐도 그렇다. 또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순교한 예수님의 제자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들 중 누가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인가?
능력주의가 복음까지 해치고 있다. 샌델의 책 Chpater 2에 상당 부분 기독교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미국도 상황이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구원은 내 노력으로 얻은 것인가? 그리고 신의 상과 벌이 인간의 어떤 행동에 따라 바로 직접적으로 임한다면 결국 상과 벌을 신이 내린다고는 하지만, 결국 인간은 자기가 받을 것을 받는 것이 아닌가?
만약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면 고난은 죄의 증표일 것이다. (86)
능력주의가 해로운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 두 나라를 비교해보자. 두 나라를 A, B라고 하자. 두 나라는 똑같이 불평등한 나라다. 하지만 불평등한 이유에는 차이가 있다. A는 귀족 신분제 사회로 소득과 재산은 어떤 집에서 태어나느냐에 달려 있고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B는 능력주의 사회로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은 세습 특권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각자가 노력과 재능에 따라 얻은 결과물이다.
A나 B 둘 다 불평등한 정도는 똑같다고 가정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B가 A보다 낫다고 여길 것이다. 내가 봐도 그렇다. 그 이유는? 출생에 따른 불평등은 부정의하다고 여기지만, 재능과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그렇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능력주의를 따르는 B라는 나라는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공정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샌델은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능력주의를 완벽하게 따르는 사회가 공정하다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자 책의 제목이다. 귀족 신분제 사회인 A보다 기회가 평등한 B 사회에서 생긴 불평등이 더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기회가 평등했기에 각자가 모두 받을 것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니 성공한 사람이 실패한 사람들을 돌볼 이유가 없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각자의 부는 각자의 몫이다.
샌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를 부정적으로 본다.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따르고 능력주의가 잘 실현된다고 느낄수록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고 연대는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귀족 신분제를 따르는 A라는 나라에서 상류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자신의 특권이 스스로의 성취가 아니라 큰 행운임을 인식할 것이다. 반면에 능력주의를 따르는 B라는 나라에서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면, 자신의 성공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쟁취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B라는 나라에서 가난하다면 가난함과 더불어 좌절감에 빠질 것이다. 반면에 귀족 신분제를 따르는 A라는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다면 힘들긴 하겠지만, 그런 낮은 지위가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부담은 지지 않을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는 불평등 구조를 능력에 따라 재구축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재구축은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벌려놓는다. 이것이 능력주의가 해로운 이유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만약 불평등이 심화되더라도 각자 재능에 따라 받을만한 것을 받은 것이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샌델은 이렇게 반문한다. '능력주의에서는 정말로 각자가 받을만한 것을 받은 것인가?' 우선 능력주의 사회에서조차 적어도 최상위층은 '남다른 출발점'에서의 유리함이 있다. 샌델은 미국의 대학 진학률로 근거를 든다. 상위 20퍼센트 부자들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1/5인데 반해 하위 빈자들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할 확률은 1/50이라고 한다. 즉, 기회의 평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제한할 수 없지 않은가.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 공감이 많이 됐다. 애초에 부모의 영향, 즉 출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출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완벽한 능력주의가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다들 아니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또 더불어서 '과연 재능이라는 것은 온전히 자기 것인가?'라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메시. 농구 황제 르브론 제임스의 재능은 그들이 태어나면서 받게 된 우연한 선물이다. 물론 그들이 노력을 안 했는데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 선수 중에 르브론과 메시만큼 노력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축구의 신은 한 명이고, 농구 황제도 한 명이다. 그들이 최고가 된 데에는 재능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에디슨도 말했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재능이라고. 이 말을 보고 '99가 노력이니까 노력이 재능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네'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렇지 않다. 99가 노력이지만, 결국 재능 1이 없으면 100이 채워지지 못해서 천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재능의 중요성을 말하는 거다. 샌델도 본인이 르브론만큼 농구 연습을 한다고 해도 르브론만큼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성공에서 재능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
이처럼 내가 이런저런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다. 능력주의에서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혜택을 누릴 자격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행운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는가?
재능을 찬양하는 것이 잘못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어떤 재능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재능이 되는지는 운이다. 만약 르브론 제임스가 백 년 전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가끔 죽고 나서 그 재능을 인정받고 유명해지는 사람을 보곤 한다. 고흐가 지금 태어났다면 그때보다는 더 성공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이처럼 어떤 재능이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인지는 운이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잘하는 게 하나쯤은 있다고. 즉, 누구나 재능이 하나쯤은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거다. 그 재능이 사회에서 인정하는 재능인지, 사회가 우러러보는 재능인지, 돈이 되는 재능인지는 운이라는 거다. 어떤 시대에 태어났냐에 따라, 재능을 인정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자신의 재능 때문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걸 오직 그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건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재능도 선물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어떤 재능을 갖고 태어날지도 운이지만, 그 재능이 사회에서 후하게 보상하는 재능이라면 그것 역시 운이다. 즉 능력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재능과 능력으로 받을만한 것을 받는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우리의 재능은 결국 누군가의 선물이다.(유전이든, 우연의 결과든, 신의 선물이든) 우리가 거기서 비롯된 혜택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 하는 것은 실수이자 자만이다. (201, 202)
능력주의에 문제가 있으니 재능과 노력이 사회적 역할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나? 전체주의를 통해 공산주의를 실현해야 하는가? 샌델의 뜻은 그게 아니다. 샌델의 주장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로 옹호되어 온, 그러나 분노를 퍼뜨리고 정치에 해를 끼치며 사회를 갈라놓는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247)
현재 우리 사회의 부자와 권력자들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만해졌다. 능력주의자들이 그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찬양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잘 따라왔다면 성공이 오직 그들의 능력 때문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성공에는 운이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부모든, 재능이든 말이다.
능력주의에는 대중을 향한 모욕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성공을 대하는 생각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 샌델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성공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 그것이 불평등한 사회가 조금이나마 나아질 희망의 불씨다. 아름다운 사회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야 성공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오만한 시선으로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변화 없이 복지를 늘리고 사회 시스템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사회의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
샌델은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사회의 불평등을 완벽하게 해소할 수는 없다. 결과의 평등을 하려면 전체주의로 가야 하는데 우리는 전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 샌델은 결국 '직업에 귀천은 없다'는 말이 진정으로 실현돼야 한다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든 그렇지 못한 직업이든 모두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성공이 선물이고 운이다.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통해 정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란 능력주의 사회다'라는 생각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있다.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질 수도 없지만, 이루어진다 해도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회의 평등이 잘 이루어졌을 때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더 심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들이 받을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고 연대 또한 거의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샌델은 최종적으로 겸손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 충적적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