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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 and R Jan 22. 2021

기도에 관한 질문들

『C. S. 루이스 기도의 자리로』 - 엮은이: 마이클 G. 모들린

한 줄 평: 이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일단 기도하자.

C.S. 루이스의 글을 엮은 책

    기독교 서적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작가인 C.S. 루이스. 대중적으로는 『나니아 연대기』가 가장 유명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순전한 기독교』가 1순위로 떠오르는 작가다. C.S. 루이스가 『반지의 제왕』작가인 톨킨과 친구라는 건 꽤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 서적에서 C.S. 루이스의 이름이나 그의 글을 조금이라도 인용하지 않은 책은 찾기 힘들다. C.S. 루이스가 기독교 변증과 신앙에 미친 영향력을 보면 루이스는 넉넉히 월클이다. 기독교 서적에 입문한 지 몇 년이 흘렀기에 C.S. 루이스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알라딘에서 책을 구경하던 중 C.S. 루이스의 신간이 나와서 놀랐다. C.S. 루이스의 책이라면 읽지는 않았어도 제목은 다 알고 있을 거라 자신했는데 <기도의 자리로>라는 제목은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책은 C.S. 루이스의 글이 맞긴 하지만 C.S. 루이스가 낸 책은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의 자리로>라는 책은『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기적』, 『고통의 문제』 등 C.S. 루이스의 저작들에서 기도에 관한 통찰이 담긴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모두 C.S. 루이스의 글이지만, C.S. 루이스가 직접 <기도의 자리로>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 것은 아니다. 마이클 G. 모들린이라는 출판사 편집장이 엮은이로 이 책을 냈다. C.S. 루이스의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이렇게 기도에 관한 내용만을 모아 놓으니 C.S 루이스의 기도에 관한 생각을 한 번에 볼 수 있어서 편리했다. 175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기에 순식간에 기도에 관한 전반적인 질문들과 C.S. 루이스의 답을 훑어볼 수 있다. 한 번에 다 읽지 않더라도 이 책을 소지하고 있다면 신앙에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기도에 관해 의문이 생겼을 때 이 책을 편다면 적절한 해답을 얻고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을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시는데 굳이 왜 기도해야 하는가? (2장) 

'시시콜콜 내 일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건 염치없는 일인가?' (4장)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할 덫은 무엇인가?' (7장)

'기도를 꾸준히 하려면?' (8장)

'고난이 영혼에 유익하다는데 고난을 면하려고 기도해도 되는가?' (14장)



    15개의 주제 중에서 공감됐던 주제 몇 개만 다뤄보겠다.


하나님이 내 필요를 이미 다 아시는데 굳이 왜 구하는가?

    우선 기도 무용론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기도 무용론은 하나님의 전지하심(모든 것을 아심)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이 모든 걸 아시는데 간구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을 조금만 더 하다 보면 간구하는 기도가 아무 쓸모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구하는 기도를 뺀 나머지 기도(감사, 찬양, 회개)만 해야 하는가? 사실 기도에서 감사, 찬양, 회개, 간구를 깔끔하게 선을 나눠 분리하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감사함을 아뢰다 보면 간구를 하게 되고, 회개를 하더라도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는가. 결국 감사, 찬양, 회개, 간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논의를 위해 감사, 찬양, 회개, 간구를 분리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 해도 간구를 그만 둘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알려주신 기도의 모범(주기도문)에도 간구하는 기도(일용할 양식)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잔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 기도를 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간구 기도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된다는 걸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취사선택하는 건 다른 종교가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간구하는 기도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C.S. 루이스는 기도 때문에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도 같은 논리가 성립한다고 말한다. 손을 씻는 행위부터 누군가에게 소금을 건네 달라는 부탁, 비 오는 날 우산을 쓰는 행위까지 말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든 말든 하나님께서 내가 비를 맞는 게 선하다고 생각하시면 비를 맞을 것이고, 내가 비를 맞는 게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우산을 쓸지 말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행동할 필요도 없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억지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맞다면 비가 올 때 우산을 쓰는 행위 이전에 우리가 바깥으로 나가는 행동마저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건데 무엇 하러 바깥으로 나가는가. 일은 왜 하는가? 밥은 왜 먹는가? 우리가 건강하길 원하시면 먹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 영양분을 주실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이상하다는 건 모두가 안다. C.S. 루이스는 기도도 이와 같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운행하시고 통치하실 때 우리의 행동과 기도가 변수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행동을 즉흥 연기로 허용하신다. 그러나 그 즉흥 연기는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종속되어 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생각할 때 동시에 생각하면 좋은 성품이 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라는 거다. 우리가 지금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이걸 우리와 같은 시간 속에서 '아 누구누구가 지금 이런 기도를 하는구나. 이 기도를 들어줘야겠다.'라는 식으로 반응하시는 게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시간에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어떤 개념인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지금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지금 막 도달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우리가 지금 하는 기도라 할지라도 하나님 입장에서 그 기도는 항상, 계속 도달하고 있는 기도라고 생각해야 한다.


시시콜콜 내 일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건 염치없는 일인가?

    두 번째 주제는 어떤 주제까지 기도해야 하는가이다. C.S. 루이스의 결론부터 알아보자. '고상한 척하지 말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숨김없이 솔직하게 기도하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 경건한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하다가 오히려 기도할 게 없어서 멍 때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경건한 척할 필요가 없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기도하는 건 불경건한 일이야.'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오히려 이런 생각은 기도에 방해가 된다. 일단 솔직하게 간구해야 한다. 바라는 것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마음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 말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다. 내 소원과 간구가 나한테 맞지 않고 선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조정해주실 것이다. 그 사실을 믿고 간구할 때 조금은 자유함을 누릴 필요가 있다. 이렇게 못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보다는 우리의 체면 때문이라는 것이 C.S. 루이스의 말이다.


기도하면 다 이루어지는가?

    C.S. 루이스는 마가복음 11장 24절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장 24절)

    무엇이든 구하면 받는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게 사실인가? 진짜 기도하면 다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인가? 심지어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하신 기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말씀을 읽을 때면 항상 생각하는 상황이 하나 있다. 축구에서 페널티 킥 상황이다. 키커도 기독교인이고 골키퍼도 기독교인이다. 둘 다 기도한다. 키커는 골을 넣게 해 달라고, 골키퍼는 골을 막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득점이 되거나 안 되거나 둘 중에 하나다. 득점이 되면서 안 되는 상황은 일어날 수 없다. 이렇듯, 마가복음의 말씀은 간단한 상황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누군가는 이렇게 답하리라. 믿음이 센 사람의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될 것이다. 믿음의 정도를 잴 수 없지만, 만약 내가 이 세상에서 믿음이 가장 세다면 내가 메시보다 축구를 잘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다른 문제들보다 더 논리적이고 신비에 싸여있어서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한 걸 토대로 최대한 이야기해보겠다. 우선 C.S. 루이스는 왜 우리의 기도가 자주 거절당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 의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그렇게 자주 거절할 것이 분명한데도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헤픈 약속을 하셨느냐이다.


    C.S. 루이스는 결론적으로 말하길 믿음의 기도에 관한 이 약속은 대다수 신자가 결코 경험하지 못하는 수준이나 종류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런 믿음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분께 협력하는 사역에 필요한 것을 요청할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리뷰를 쓰면서 봐도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과 종, 주인과 친구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종은 주인의 일을 완벽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인의 친구는 주인의 일을 종보다는 더 잘 알 수 있다. 이것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로 보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만약 우리가 종을 넘어 하나님과 친구의 관계가 된다면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더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들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도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이다.


    즉, 마가복음 11장 24절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해도 다 이루어진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종을 넘어 친구가 되면(우리의 믿음이 강한 믿음, 진짜 믿음이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놀라운 말씀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해한 바다.


결론

    이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일단 기도하자는 거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기도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또 어떻게 기도할지 몰라 멍 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우리의 기도가 어리석을 수 있지만, 솔직한 기도를 드리는 게 마땅하리라. 경건한 척하지 말고 일단 기도하자. 조정해 주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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