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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푸리 May 21. 2020

오! 나의 존잘님

아이돌의 콘텐츠를 덕후는 단순 소비하지만은 않는다. 이를 2차 가공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창작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재료가 좋을수록 맛있는 요리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누추한 식당에서 변변치 않은 재료로도 미슐랭 쓰리 스타급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존잘님’(= 금손)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가 있다. 존잘님은 덕질의 늪으로 인도하는 시계 토끼와 같다. 


아이돌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글로 쓰고 ‘짤’(사진) 한 장으로 오만 가지 기상천외한 드립을 치는 등 그들이 생산하는 창작물은 원본의 가치를 드높이는 동시에 덕후의 잉여 시간을 풍족하게 채워준다. 아이돌에게는 공백기라는 것이 존재하고 또 여러 이유로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는 시기도 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순위 조작 혐의를 받으며 활동이 위축되었던 프엑의 경우가 그랬다. 떡밥이 가뭄에 콩 나듯 했기 때문에 프엑 ‘추팔’(추억 팔이)이나 하면서 기약 없는 보릿고개를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이때 존잘님의 존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존잘님의 재질은 십중팔구 ‘알페서’이다. ‘알페스’(RPS, Real Person Slash)는 아이돌의 동성 커플링을 의미한다. 둘이 유독 친밀하거나 함께 있으면 케미가 좋다거나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그냥 대충 내가 좋아서 엮기도 한다. 심지어 팀에서 둘이 가장 친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엮어버리는 경우도 봤다. 그리고 짝사랑의 서사를 갖다 붙이면 제법 그럴듯해진다. 알페스는 음지 문화이기도 하고 표현 수위가 상당히 높기 때문에 트위터 ‘써방’에 특히 신중을 기한다. 가능하면 검색에 걸리지 않도록 수 차례 검증 후에 씨피(= 커플) 명을 정한다. 흥한 아이돌은 알페스판도 엄청나게 활성화되어 있기에, 알페스는 인기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아이돌 사이의 ‘비게퍼’(비즈니스 게이 퍼포먼스)나 ‘비레퍼’(비즈니스 레즈비언 퍼포먼스)는 공공연한 영업 비밀이 되었다. 아이돌에게 연애가 허락되는 건 오로지 ‘한 그룹의 멤버끼리’뿐이다.


알페서 중에서도 글과 그림, 만화를 창작하는 이들을 ‘연성러’라 한다. 트위터에서 주로 활동하며 수시로 작품을 올리고, 간혹 ‘포스 타입’ 계정과 연동해 활동하기도 한다. 성인 인증을 받아야 열람이 가능한 포타의 기능이 BL(Boys Love) 문학의 속성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BL이라면 이정애, 시미즈 레이코, 요시나가 후미 등의 만화를 적잖이 즐겨보긴 했지만, 알페스는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게 과연 몰입이 될까 싶었는데 우연히 팬픽을 쓰는 한 존잘님을 만나 그 세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알페스는 실제 인물을 전부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일부를 가져다 쓰는 방식이었다. 외모, 말투, 방송에서의 몇 마디 말을 인용하고 시대, 직업, 주변 상황 등 나머지 설정은 창작의 영역이다. 나의 존잘님은 SF 장르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초능력을 잃어버린 히어로에 관한 이야기는 완전 몰입해서 봤는데, 그 세계 속 최애의 ‘캐해’(캐릭터 해석)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존잘님의 팬픽으로 나의 ‘오티피’(OTP, One True Pairing)가 정해졌다. 그러고 나니 수상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비밀 연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커플이 정해지면 캐릭터를 부여받는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커플에게는  가지의 각기 다른 캐릭터 주어진다. 상대에게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공’과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수’이다. 왼(좌)과 른(우)이라고도 한다. 공과 수를 결정하는 건 ‘형태’가 아니라 ‘상태’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즉, 외적인 모습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 사이의 서사와 화학작용이 더 흥미롭게 때문이다.


수와 공의 사전적 의미보다는 상황으로 이해하면 더 쉽다. 공은 자기 세계가 확고하고 취향과 주장이 확실한 캐릭터다. 그에게는 타고난 밝음이 있다. 그런 공 앞에 수가 나타나 의도치 않게 공을 변화시킨다. 공은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네가 처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수는 태생이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에 자꾸 휘말리고 뜻하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비난을 받는다. 그래서 ‘미안하다’ 거나 ‘내가 다 잘못한 거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있다. 최애를 연성할 때 어느 포지션을 둘까도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최애는 무조건 ‘수’라고 주장하는 ‘최애 총수 강경파’이다. 최애가 그의 짝에게 지독한 사랑을 받는다는 설정이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최애의 고난과 역경은 MSG처럼 서사에 감칠맛을 더한다.


나에게는 하늘이 맺어준 둘도 없는 짝이지만, 알고 보니 마이너 중 마이너였다. 내 오티피는 연성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가 그마저도 최애가 수가 아닌 공으로 먹히는 ‘리버스’가 더 많은 상황이었다. 한 번은 중학생인 큰 조카와 각자의 덕질에 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아이돌의 마이너 씨피를 파는 설움에 대해 하소연하며, 하도 먹을 게 없어서 리버스판을 기웃거린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조카는 자신은 2D판의 ‘백합’(= GL, Girls Love)을 파고 있는데 이 판이 얼마나 작은지 아냐며, 그렇지만 ‘그건 아니다’라고 강경하게 말했다. ‘최애를 공으로 먹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는 조카의 말에 크게 감읍해 다시는 저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제는 최애가 왼쪽에 있는 사진만 봐도 대단히 심기가 불편하다.


나의 오티피가 ‘지옥의 크오’(팀이 다른 아이돌을 커플링 하는 것으로 새로운 떡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연성 자체가 씨가 마르게 된다.)가 되긴 했지만 기대의 끈은 항상 놓지 않고 있다. 연성을 할 때는 당연히 1차가 빵빵 터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지금 일명 ‘1차가 다하는’ 씨피도 파고 있는데, 그들의 연애(?) 행각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이렇게까지 티를 내주는데 모른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1차가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그냥 서로 같은 옷만 입어도 알페서들이 다 알아서 엮기 때문에 그저 서로 연락하고 친하게만 지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올라온 오천년만의 떡밥. 트위터에 오열하는 알페서들이 한무더기였다.


알페스판의 너무나 소중한 존재로 ‘주접러’도 빼놓을 수 없다. 주접러는 10분 정도 분량의 콘텐츠로 최소 1시간 이상 떠들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마치 물에 넣은 마른미역처럼 부풀어 나는 주접을 보고 있자면 감탄과 내적 박수가 절로 나온다. 떡밥이 뜨면 주접러는 절대 1절로 끝내는 법이 없다. 4절까지 완창해야 하고 재방송과 재재 방송은 기본이다. ‘쿨타임’이 차면 예전 떡밥도 끌어올려 리트윗 한다. 주접러의 스킬로 ‘모에화’(사물이나 동식물의 어떤 특징을 의인화하는 것. 아이돌의 신체나 표정 등을 호감이 가도록 빗대는 것을 말한다)가 있는데, 트위터에 어떤 단어를 검색해도 아이돌이 나오는 건 다 이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아이돌 덕질에서 알페스가 가장 건강한 방식의 팬질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돌이 주는 떡밥은 한계가 있고 덕후는 만족을 모른다. 따라서 마음 한편에 불만을 가지게 되고 이 불만이 쌓여 이상한 방식으로 분출하기 마련이다. 알페스는 이러한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하나의 창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돌판에서 알페서들이 가장 재기 발랄하다. 아이돌 알페스판에선 우리나라의 미술학도와 국문학도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낭비하며 오로지 자신의 쾌락과 재미를 추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목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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