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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실이 Oct 09. 2022

사랑하는 나의 반려에 대하여

같이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처음에는 그저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에 이끌려 강아지를 키우자고 부모님을 졸랐던 것 같다. 까만 눈, 촉촉한 코, 말랑말랑한 발.. 이 모든 외모가 나의 마음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부모님은 맞벌이에 나는 초등학생이라서 결국 강아지를 키우지 못했다. 한동안 도서관에 가면 동물도감 같은 책을 펼쳐놓고 나중에 무슨 개를 키울지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초등학생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친구의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작은 새끼 강아지가 꼬물꼬물 귀여웠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강아지는 처음 봐서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는데 친구네 어머니께서 나에게 원하면 한 마리를 데려가도 좋다고 하셨다. 나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당연히 엄마는 반대하셨다. 원하던 강아지가 눈앞에 있고 친구네 어머니도 그냥 데려가라고 하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몇 날 며칠 동안 부모님을 졸랐다. 키울 수 있게 해 준다면 산책을 시키는 것도, 밥을 주는 것도, 배설물을 치우는 것도 다 내가 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부모님은 데려오라고 하셨고, 나는 신나게 강아지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강아지는 정말 작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강아지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밥도 물에 불려서 주었고, 새벽에 혼자 깨서 낑낑거리면 학교에 가기 전에 일어나서 졸린데 강아지를 돌보다 등교했다. 어린 내가 한 생명체를 돌본다는 것이 내심 스스로 뿌듯했고 이 강아지를 꼭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아지는 내 전부였고, 내 둘도 없는 친구였다. 초등학생이라 돈이 많지는 않았어도 틈틈이 간식을 사주고 예뻐했던 거 같다. 그러나 강아지를 예뻐하는 마음만으로는 함께할 수 없었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 강아지와 이별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강아지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부모님이 생각하시기에는 마당 있는 넓은 집에 강아지를 보내는 게 맞다고 판단하셨고, 결국 삼촌이 오셔서 지인의 집에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울었다. 내가 처음 선택한 내 가족과 처음 맞게 된 이별의 괴로움은 어린 나이에도 생각보다 컸다. 한동안은 우울감에 어둡게 지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은 반려동물과 관련된 프로그램도 많고 애완견, 애완묘가 아니라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시대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주 그런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개에 미쳤다고 말했다. 그 말이 나를 상심하게 만들었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 강아지를 보내기로 결정한 부모님 등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뒤덮었다. 한참을 지나서 돌이켜보니 나는 이별을 겪으며 성장통을 호되게 겪었지만 그 강아지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생명을 데려와놓고 그 강아지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있어주진 못했지만 부모님도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서 계속해서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나를 보니 부모님은 다시 강아지를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내가 조금 더 크고 나서였다. 펫 샵에서 데려오지 말고 누군가가 키우다가 사정으로 키우지 못하게 된 강아지를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전에 함께했던 강아지에 대한 내 나름의 속죄였다. 나는 1살 된 강아지를 12년 전 이렇게 맞이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같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나와 나의 반려의 시간은 너무나 다르게 흘러간다. 학생이었던 나는 지금 청년이 되었는데 나의 반려는 어린 새끼 강아지였다가 지금은 할아버지가 됐다.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반려동물을 맞이한다는 것의 책임감을 알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다 아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별을 다시 한번 준비하고 있다. 지난번에는 준비하지 못해 이별이 너무 아팠지만, 준비를 하더라도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보내줄 때는 잘 보내주고 싶다. 반려동물과 함께한다는 책임감은 이런 거다. 활발했던 나의 강아지가 다리가 아프게 되어 잘 걷지 못하고 있는 걸 지켜봐야 하는 것, 눈을 까맣게 채웠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하얗게 변해가서 잘 안 보이게 되는 것, 가족들이 집에 돌아오면 어디에서 자고 있든 한걸음에 달려 나왔는데 이제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가족들이 온지도 모르고 계속 자기 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것, 이제 나이가 들어 전에 좋아하던 간식이 딱딱해 씹지 못하는 것. 더 많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과 같지 않은 나의 반려의 모습을 보고 그걸 견뎌내야 하고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보살펴 주는 것이다.


철이 없었던 시절에는 강아지의 좋은 모습만 봐서 그저 예뻐만 해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럼 강아지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강아지가 사고를 쳐도 참을 수 있는 인내심, 아프면 돈과 시간을 들여 병원에 데려가고 간호해야 하는 마음, 혼자 집에 있을 강아지가 심심할까봐 나의 약속을 뒤로하고 강아지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 강아지가 늙어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곁에서 지켜주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을 요즘 배우고 있다. 내 반려와 나에게는 영원이라는 것이 없어 유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강아지가 왜 좋냐고 묻는다면 얼굴이 귀여워서인 것도 있는데 지금은 그냥 내 가족이다. 가족 같은 강아지가 아니라 내 가족이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만난 나의 가족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 나왔는데 저분들이 내 부모라고 하니까 사회적으로 가족이 된 거다. 하지만 나의 강아지는 나의 선택으로 내 가족이 됐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강아지가 잠들기 전 강아지의 손과 내 손을 맞잡고 너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한 약속을 꼭 지켜줘야지. 앞으로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날들을 최고로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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