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단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를 뒤늦게 관람했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러닝 타임이 3시간 가량 되면 덜컥 겁부터 난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기억하기 버겁거나, 그조차도 아니어서 마냥 지겹기만 할 수도 있다. 다행히 세 시간이 지루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고 장단점이 분명한 영화처럼 보였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곧장 생각나는 게 있다. 영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홀리웰이 쓴 희곡 <리틀 말콤>(1965)이다. 연극 <리틀 말콤>은 주인공 말콤이 대학에서 쫓겨나 울분에 차서 친구들과 함께 정치조직을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방구석에서 진행되는 허황된 의식과 선언에 지나지 않으며 친구들 역시 점점 말콤이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그들이 대항하려는 세계와 비슷해지는 걸 느끼면서 파국에 이른다. 어쩐지 이 줄거리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중반부까지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예 극초반 퍼피디아가 록조와 조우했을 때 발기를 강제하는 부분에서 <리틀 말콤>의 향기가 벌써부터 진하게 나기 때문이다. <리틀 말콤>에서 말콤이 친구들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조직 이름이 바로 '강력 발기당'이다.
다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는 혁명이 좌초되는 까닭이 리더의 독선이 아니라 배신과 중과부적에 있고, <리틀 말콤>에는 없는 가족 서사가 깃들어있다. 연극의 말콤은 자신의 부족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감추려고 허황된 혁명을 부르짖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엔 짝사랑하는 앤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결말도 어느 정도는 맥락을 같이한다고 봐야겠지만, 영화 쪽이 좀 더 폭넓은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봐야겠다.
이 영화는 평범한 클로즈업을 자주 쓰는데(위) 한편으론 극단적인 와이드 숏에 딥 포커스로 스크린을 통째 쓰기도 한다(아래)
전체적인 맥락은 <리틀 말콤>을 따르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만의 강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히려 영화의 미학적 측면에서 이 작품은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연출의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점프컷이 많이 사용되고 장면의 연속성을 잘 고려하지 않는다. 16년 세월을 훌쩍 넘겨버린 중반부의 편집, 앵글이 정반대거나 부자연스러운 인물 A와 인물 B의 숏이 등장하는 것, 카메라의 포커스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서사의 진행에 따라 미장센과 인물의 중요도를 결정하는 것, 연출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환경을 소재로 삼는 것 등 정석과 파격을 오가며 모두 언급하기가 힘들 정도로 다양한 숏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3시간 가까운 이야기가 통일성 있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숏의 확장과 축소, 숏과 숏을 잇는 편집점의 완급조절이 탁월하다는 뜻이다. 마치 오손 웰스 감독의 <악의 손길>(1958) 오프닝 시퀀스를 보는 듯한 기분을 영화를 보는 내내 느낄 수가 있다. 영화의 숏과 숏을 계속해서 바느질하는 배경 음악의 힘도 빼놓을 수 없겠다.
서사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은 있다. <리틀 말콤>의 말미에는 당을 해체하고 각자의 삶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친구들이 폭주하는 말콤에게 '인생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방향을 잃는다'는 말을 남긴다. 애인을 따라 덜컥 혁명에 가담했지만 온 세상을 누비던 젊은 날의 팻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뒤 애인의 딸만 덩그러니 남은 상황에서 방향을 잃고 터전에 눌러앉는 수동적인 인물로 변모한다. 달리 말하면 외부로 향해있던 인생의 방향이 딸이라는 존재를 향해 수렴해 버린 것인데, 록조가 딸을 자신을 추격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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