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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학 May 06. 2019

이런 일에 이렇게까지 고민해야해?

[막차 호주 워킹홀리데이] 02




케언즈는 관광지이다. 고로 워홀러들에게 가장 많은 일자리는 접객하는 일이다. 종류는 다양하다. 레스토랑 서빙, 크루즈 승무원, 바리스타, 식당 점원, 리조트 잡 등등. 시급도 좋은 편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다. 꿈의 주 천불. 한 주에 천불 이상 버는 것이 워홀러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다. 그말처럼 대부분의 일자리로는 주에 천 불 이상을 벌지 못한다. (극성수기 예외) 고로 사실상 주천불을 찍으려면 공장이나 농장일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케언즈 같은 작은 관광지에 무슨 농장, 공장이 있을까 싶겠지만은, 놀랍게도 한 군데가 있다. 워홀러들 사이에선 '케언즈의 삼성'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주급을 보장하는 세탁공장이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그곳이 내 첫 일자리였다.






새벽 5시. 어젯밤 설정해놓은 알람이 울린다.

출근시간은 6시. 공장까지는 걸어서 25분이 걸리니까 재빨리 씻고 토스트를 구워먹고 나선다. 도착하니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세탁공장에서 일한다고 처음 말했을 때가 기억난다. 우리나라 세탁방 같은 거냐고 물어서 엄청나게 웃었다. 내가 다녔던 곳은 말그대로 공장이다. 각종 호텔, 리조트, 병원에서 오는 시트. 타월, 베갯잎, 티타월 등등을 세탁하고, 건조하고, 포장한다.


내가 맡은 파트는 필로우케이스, 즉 건조된 베갯잎을 기계에 넣는 일이었다. 그러면 자동으로 접혀져 나온다. 그 베갯잎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넣느냐가 포인트였다. 나는 첫시간에 300개 정도를 넣었다. 팀장은 내 기록을 보더니 더 빨라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시간당 700개가 공장이 원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한 개를 몇 초만에 넣어야 700개가 되는지 계산해보았다.


한 시간 60분 * 60초 = 3600초.

3600초 / 700개 = 약 5.1초.


처음에는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일단 건조된 필로우케이스는 구깃거리는 상태로 온다. 그러면 그걸 구겨지지 않게 한 번 털어서 편 뒤 기계에 넣어야 한다. 털지 않고 그냥 넣으면 어떻게 되냐고? 기계 뒷편에서 개어진 베갯잎을 받던 팀장이 나에게 달려온다. 베갯잎을 펴지않고 넣었기에 '구김있게 접혔다'라는 이유다. 또한 베갯잎을 받아먹는 기계 벨트에는 그어진 라인이 있다. 그 라인에 맞춰 넣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베갯잎이 반듯이 접히지 않거나, 오염되거나, 심하면 기계가 멈춘다. 이러면 또 혼나게 된다.


이쯤에서 혼이 난다는 말에 놀라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다. 이 세탁공장은 '인건비가 비싸서 노동자를 대우한다'는 호주 풍토와 달리, 노동자를 기계 부품처럼 생각한다. 첫날 쉬는 시간에 나는 동료들로부터 여러 가지 경악할 이야기를 들었다. 속도가 느리다고 일 시작한지 며칠만에잘린 직원, 기계를 멈추게 만들어서 잘린 직원, 조금 아프다 했다고 잘린 직원 등등. 그야말로 제몫을 해내지 못하면 잘리는 거다.


그쯤되니 한 시간에 300개의 베갯잎을 처리하던 나는 걱정이 들었다. 이러다 잘리겠구나. 대부분의 워홀러는 캐쥬얼casual 형태로 계약하기 때문에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처음에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한 시간당 700개를 내 동료들은 해내고 있었다.


내 속도가 느렸던 이유는 이렇다. 나는 완벽주의자다. 내 눈에는 뭔가 베갯잎을 더 펴야할 거 같고, 기계 벨트에 넣을 때 라인이 삐뚠 거 같고 그래서 완벽하게 맞추려다 보니 10초, 15초가 훌쩍 지나던 거다. 물론 일이 손에 안 익은 탓도 있었다. 겨우 첫 날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세탁공장의 악명을 들은 이상 내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속도를 내야만 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고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속도만 며칠째 나왔다.


그렇게 며칠 연속 '해고'만 걱정하다 보니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내 자신이 일을 못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딜 가든 일 잘 한다는 소리만 들었고 내 스스로도 일을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었다. (이미 완벽주의자라고 밝혔듯이 말이다.) 그런 내가, 단순 노동이라는 공장일 때문에 이런 스트레스를 받을 줄은 몰랐다. 이건 한국에서 보통 직장에 다닐 때와는 또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공장일은 내 전공이 아니다. 내 적성도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이 두 가지에 해당 안 되는 일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호주에서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 안 되는 일을 하고 있고, 이건 지금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일자리였다. 공장이 주는 압박감이 더러워서 때려치고 싶으면서도 주급 높은 일자리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더 일을 잘할 수 있을지 몰랐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생각도 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고민해야 하지?
내가 이런 고민을 한국에서 하지는 않는데? 



그러다가도 내가 육체노동을 폄하하는, (지금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잘난 척을 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내가 호주를 사랑하는 이유는 육체노동이 그만큼 정당한 댓가를 받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쨌든 이런 식의 패배감과 우월감 때문에 일하면서, 퇴근해서도, 잠들기 전에도 괴로웠다.


아마 나처럼 늦은 나이에 워홀을 나오면, 그리고 한국에서 일자리가 괜찮았고, 벌이까지 괜찮았던 사람이라면 이런 고민에 더욱 쉽게 부딪칠 거다. 공장일 보다 나은 취급을 받는 서비스직을 하면 기분은 나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한국에서의 일자리와 비교하며 고민하게 될 거다. 그러니 목표가 중요하다. 나같은 경우에는 전에도 말했듯이 '그냥 살러' 온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자꾸 머리 쓰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머리 쓰는 것을 멈추고 싶었다. 공장일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단 뜻이다. (물론 막상 하게 되니 '내가 이런 일에 이렇게까지 고민해야해?' 거만한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내 목표가 영어였다면 분명 좌절했을 거다. 영어를 쓸만한 환경은 전혀 안 됐다.


어쨌든 나는 고민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틈틈이 동료들을 관찰했다. 보다보니 나처럼 신경써서 넣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이 대충 넣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과도하게 완벽하게 하려했던 거다. 그 다음날에 나는 조금 덜 완벽하게 넣어보았다. 속도는 빨라졌고 팀장은 달려오지 않았다. 한 달 정도 지나니 완벽하게 감을 잡아 머리가 아닌 몸이 일을 했다. 


그때부터 아침 5시에 기상에 오후 2시에 퇴근하는 공장 생활이 진짜 시작됐다. 주급이 마음에 들어 굳이 다른 일을 찾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듣자하니 이 공장에 들어오려고 한 달 이상 웨이팅하는 사람이 수두룩했고, 내가 일하는 동안에도 워홀러들의 레쥬메는 쌓였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곳에서 일한다고 하면 웃음소리만 돌아왔다.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다고, 그냥 한국에 돌아오라고 했다. 여기 워홀러들에는 절실한 일자리인데. 한국인들과 워홀러들의 온도차 사이에서 나는 '이런 일을 해서' 부끄럽기도 하고, '이 일을 해서' 안도하기도 했다.






당신이 나와 같은 나이라면, 워킹 홀리데이를 오기 전에 이런 고민을 할 것이다. 내가 목표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영어가 필요한지. 그러나 우리는 실패가 무서운 나이 아닌가. 그러니 '만약'도 대비해야 한다. 직설적으로 내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느 정도의 일까지 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목표한 것 아니면 절대 안 해!' 주의라면 자금을 넉넉히 들고오길 추천한다. 호주 내에서 아무 경력도 없는 워홀러를 단번에 고용하는 곳은 많지 않다. 특히나 당신의 영어실력이 그렇고 그런 수준이라면 더욱더. 물론 아예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되기는 된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니까 돈에 쪼들리지 않게 하라는 거다.


하지만 자금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면 우선 구해지는 일부터 시작할 확률이 높다. 그 일의 선을 긋는게 중요하다. 나같은 경우에는 한인잡은 피하고 싶었다. 영어도 안 될 거고, 한국인 상사가 싫어서 호주까지 갔는데 또 한국인 상사 만나기는 싫었다.(이처럼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선택일 뿐, 한인이 나쁘다는 거 아닙니다) 다만 시급 몇 불 이상이면 한다, 이런 조건을 달았다.


그다음 우선 구해진 일을 시작했다면, 내가 원하던 직업에 계속 컨택해라. 나같은 경우에는 드림잡이 없었으니 안주했지만, 드림잡이 있는 사람들도 안주하기 쉽다. 외국어로 또다시 일자리를 구한다는게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무슨 일이든 '호주 국가의 일'을 시작해서 '경력'을 만든 후, 다른 곳에 레쥬메를 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이직하겠단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한다. 안주하기 쉽다. 새로운 도전하기 겁먹기 쉽다.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해봤으니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지 않는가. 굳은 다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고민에 대한 답이 서도, 막상 워홀에서 일자리를 구하다보면 흔들릴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이런 일에 이렇게까지 고민해야해?' 싶을 수도 있다. 나는 방법을 찾고 견뎌내려 했지만, 당신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다.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따윈 없다. 그 일이 잘못 됐을 수도 있으니까.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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