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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sembler Jun 04. 2020

우리 할아버지

친할아버지 이야기




"서걱서걱"


우리 할아버지는 언제나 빨간 고무대야 위에 직사각형 나무판을 올려놓으시고는,

그 위에서 도라지 껍질을 까셨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의 야채를 다듬는 일은 할아버지의 몫.

황토빛 껍질의 도라지가 할아버지의 칼질 몇 번이면 이내 하얀 속을 드러냈다.

 

그렇게 다듬어진 뽀얀 도라지는 시장 나온 아주머니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깨끗하게 다듬어지면 값이 올라가는 것이 야채장사라서,

밤에도 낮에도 할아버지는 큰방에 앉아 도라지를 다듬으셨던 거겠지.


도라지를 까고, 마늘을 까고, 또 뭘 다듬으셨더라..

벌써 15년도 더 된 기억이라 이젠 가물가물하다.




우리 할아버지는 사실 본 직업이 따로 있는 분이셨다.

요즘도 흔히 길을 가다 뵐 수 있는, 폐지 줍는 노인.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사진사'셨다고 했다.
휴가철이 되면 어린 아빠를 데리고서 바다에 가,

휴양객의 사진을 찍어주고 인화해서 보내주는 일을 하셨던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 그 얘길 듣고서는, 꽤나 멋지고 그럴듯한 직업이라 생각했다. 

늘 길에서 폐지를 모으던 그때의 할아버지보다 훨씬 멋있어 보였으니.


할아버지가 어쩌다 사진을 관두고 폐지를 줍게 되었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시대가 변하면서 사진기를 가진 것이 특별하지 않은 때가

할아버지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리하여 내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매일 폐지를 모으셨다.

한 장, 두 장, 한 권, 두 권- 우리 집에는 언제나 이름 모를 언니 오빠의 문제집이 쌓여있다.


아버지의 일과는 크게 두 가지였다.

동네를 돌며 폐지를 수거하고, 집에 돌아와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폐지를 정리할 때면,

나는 할아버지 곁에서 놀며 오늘은 어떤 물건이 들어왔나 구경하 했다.

그러다 가끔 거의 새 것과 같은 노트가 나오면 가장 먼저 집어와 내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본 주인의 손 때 묻은 흔적을 찢어버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긴 했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참 정직하고 선한 분이셔서,

주워온 폐지를 신문지 한 장까지도 다시 펴서 차곡차곡 쌓으셨다.

구겨서 가져가도 펴서 가져가도 같은 무게의 같은 값이었지만,

고물상에 일하기 좋게 가져다주어야 하는 거라며

매일 마당에서 구겨지고 더러워진 종이를 쌓고 또 쌓으셨다.

그래서 우리 집 마당은 언제나 폐지와 빈 통들로 가득했다.


어느 날부턴가 할아버지는 더 이상 폐지를 줍지 않으셨다.

이유를 여쭤보니, 고물상 사장님이 할아버지가 저울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은근슬쩍 발을 올렸다고 모함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굉장히 섭섭해하시며, 다신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내가 그 집에 몇 년을 고물을 가져다줬는데, 그런 모함을 할 수가 있냐.

나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며 억울해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할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셨다.

늘 정직이 몸에 베인 분이셨다.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90 다 된 노인이 폐지를 줍지 않겠다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마지막 직업에서 은퇴하셨고,

치매와 대상포진, 폐렴 따위의 증상에서도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99세까지 사셨다.




학부 시절, 시험을 치고 돌아와 빗소리를 들으며 나른하게 페이스북을 보다가 기사 하나를 읽었다.

폐지 줍는 치매노인의 이야기와 사진. 그 한 장의 사진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사진을 보면서, 돌아가신 뒤 꽤나 잊고 지냈던 우리 할아버지가 아주 많이 생각났다.


비를 맞고 계시는 저분이 마치 우리 할아버지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길가에 앉아 온몸으로 비를 받아내는 모습이 우리 할아버지를 너무 떠오르게 해서.


처음엔, 아- 우리 할아버지도 폐지 주웠었지.
그다음엔, 아- 우리 할아버지도 치매가 왔었지.
그 그다음엔, 가족들이 할아버지를 찾았다는 기사 내용에,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가족들이 집에 계시라 해도 자꾸만 밖에 나갔다 못 돌아오신다는,

그러다 폐지를 줍는 모습으로 발견되신 저 할아버지를 보면서-

치매에 걸린 뒤 집에만 계실 때에도 자꾸 할머니에게 "장에 나가야 한다"고

하루에도 수 번 말씀하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벌써 15년은 지났을 일이지만 여전히 생생한 것은,
만화영화를 보는 내 옆에서 고개 숙인 채 일하시던 할아버지.
그때 그 도라지 냄새, 그리고 서걱서걱하며 들리던 할아버지의 손길.


할아버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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