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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슥슥 Sep 30. 2023

부업을 포기 하고 이것부터 살펴본 이유



새 수입처 마련이라는 야심을 포기한 뒤, 처음 한 일은 그동안의 가계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소득이 끊긴다면, 모은 금액으로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게 현실적인 다음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때의 나는 부업 공부를 하며 한창 돈독이 올랐던 시기라 매월 소비 내역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 덕에 내가 평균적으로 120~150만 원으로 한 달을 생활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 고정비는 70 남짓이니 백수의 기간을 1년으로 잡고 허리띠를 졸라맨다면 최소 1,200에서 최대 1,800의 비용이 예상되는 터. 이 정도면 퇴직금을 쓰지 않고 모아둔 돈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소 낙관적인 셈이긴 해도 직접적인 수치를 마주하자 그제야 퇴사라는 희미한 목적지가 윤곽을 드러낸 것 같았다.      






그래, 까짓 거 모아둔 돈 쓰자

이렇게 말하고 다음 날 사직서를 냈다면 패기라도 있어 보였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성격이 되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조용히 결심한 뒤, 나만 보는 다이어리에 적어두던 내향인이 그럴 수 있을 리가. 과감하게 사직서를 쓰는 대신 뼛속부터 소심한 I형 인간은 책상에 홀로 앉아 다른 것들을 적기 시작한다. 그동안 배워보고 싶었던 강의나 읽고 싶었던 책의 제목 같은 것들을 말이다. 내일 배움 카드제를 만들어 포토샵과 이모티콘 수업을 주말반으로 수강하고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것도 그 목록의 일부였다. 디자인도, 글도 생계를 이어갈 수단으로 삼기엔 많이 불안하다는 것을 알아도 이번만큼은 내 욕망에 솔직하고 싶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혼자’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는 마음이 커질 대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금전적 가치를 무시하고 내 기호에 맞춰 주말을 보내는 시간이 조금씩 쌓여갔다. 오로지 흥미만으로 어떤 행위를 시작했으니 처음엔 적어도 재미 하나는 얻을 수 있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모든 배움이 그렇듯 과정이 전부 꽃길일 수는 없었다. 이모티콘 수업은 기획 자체는 즐거웠지만 실제 캐릭터를 만들고 서른 개가 넘는 동작을 구현하는 과정이 어려워 종강에 가까울수록 반포기 모드로 다녔고, 글쓰기 책을 낸 작가의 온라인 스터디 모임에 참여했을 땐 너무 반복적으로 책 광고를 해 수강 취소를 여러 번 곱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거친 흙길 속에서도 아주 드물게 꽃이 피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이런 때였다.     





 

슥슥 님의 다음 글이 궁금해요.

당시 나는 망원동 골목 안쪽에 있는 아담한 독립서점 안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기승이라 마스크를 벗지 않았음에도 나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고 있었으니까.

내 양 볼이 달아오르든 말든 글쓰기 모임의 인솔자 태재님(시와 에세이를 쓰는 작가이자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책방 매니저)은 내가 쓴 에세이의 부분 부분을 짚으며 호의적인 감상평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이제와 고백하면, 나는 그 장면을 마음 안에 사진 찍어 꽤나 오래 바라보며 지냈다.      






이유가 뭐냐고? 글쎄. 타인의 인정을 받은 사실이 기뻐서? 그런 마음이 없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보다 아주 작은 가능성을 발견한 기쁨이 더욱 컸다. 뭐가 됐든 그저 계속하고 싶은 분야에서 때마침 자그마한 재주 하나를 찾아낸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글쓰기가 나의 느린 진로 탐색에 등대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스치듯 지나간 그때의 장면은 납작했던 자신감에 옅은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주말 수업과는 별개로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고, 브런치 작가로 쓰기를 이어갔던 것도 모두 그 호흡 덕분이었다.      






반면에 9년 간 다닌 회사에서의 나는 어떠했나. 간간이 판매 성과가 좋았던 기억이 있긴 하지만 내향형 인간의 영업 생활은 전반적으로 유능감이란 게 그다지 채워지기 힘든 나날이었다. 카톡, 엑셀, 그리고 메일까지 텍스트 수단을 총 동원해 아무리 업무를 빈틈없이 한다고 한들(물론 내가 빈틈없는 스타일이었다는 건 아니다) 관계 중심으로 돌아가는 실무에선 적극성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었고, 다수가 모이는 회의 때마다 스크립트를 작성한 내가 연차가 쌓인다 한들 협업 스킬이 향상될 리도 없었다. 영업직으로 일하며 절로 몰입했던 순간이 혼자 기획안이나 발표 자료를 만들 때였던 걸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 않는가.     






사람은 일을 하면서 ‘유능감’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장강명 소설가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좋은 근무조건이었음에도 첫 직장으로 들어간 건설사에서 5개월 만에 퇴사했던 이유는 잘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일을 지속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로 유능감을 꼽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퇴사라는 꽤나 극단적인 방책을 떠올린 건 직무 부적응만큼이나 유능감 결핍이란 이유도 있었다. 미약하더라도 스스로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을 꾸준히 느낄 수 있었다면 그만둘 생각 이전에 버틸 궁리를 먼저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줍은 영업력도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예전의 나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일은 그저 주말 수업을 가능케 하는 믿을 만한 밥벌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못마땅해하는 누군가가 있던 걸까. 운명의 장난처럼 간신히 남아 있던 이 믿음마저 잃게 하는 사건이 다시 한번 발생하고 만다.      






그룹사의 결정으로 7년 간 자리를 지킨 대표가 다시 또 하루 만에 다른 이름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겪는 조직개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돌아가는 형국이 심상치 않았다. 상무이사뿐 아니라 영업팀 지원팀 가릴 것 없이 각 부서의 팀장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났고, 눈치 빠른 MD들도 경쟁사 구인 공고가 뜰 때마다 부리나케 소속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수장이 바뀐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와 직원 사이에 술렁임은 더 심해졌다. 위태로운 파도 속에서 모두들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다른 회사로 목적지를 변경하려 했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정박할 곳을 잃고 배회하는 배 신세가 되고 말았다. 크고 작은 개편을 반복해 겪자, 내 눈에는 그 어느 곳도 안전지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퇴직 또는 퇴사는 시간의 문제지 어디를 가더라도 직면해야 할 격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미치자, 소득 없는 삶이 두려워 가계부부터 샅샅이 들춰보던 불안형 내향인은 처음으로 매우 대범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누군가가 떠밀기 전에 스스로 빠져볼까?'




결국, 나는 그해 여름휴가로 간 여행지에서 퇴사를 마음먹게 된다.

한적하고, 녹음이 우거진 책이 많은 그곳에서 여태 그렇듯 아주 조용하게.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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