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슥슥 Apr 23. 2024

겨우 겨우 한 페이지를 채우고 나서

에세이 드라이브 4주차





일요일 오후 6시 45분. 결국 이 시간이 되어 책상에 앉았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내일이면 출근해야 하고, 회사에 다녀온 나의 모습은 푹 쉬어버린 파김치와 다를 바 없을 테니 마감일을 안전하게 지키려면 이제는 뭐라도 써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에피소드다. ‘공지사항’이란 글감과 연결되는 에피소드가 여전히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키보드 위에서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도 쓸 이야기를 고민하고 있다.






사실, 지난 화요일 글감을 받고 번뜩 떠오른 장면 하나가 있긴 했다. 갑자기 생겨버린 복장 규정 공지사항을 보고 불쑥 퇴사해 버린 과장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쓰고 싶은 글의 흐름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같은 팀 사수였던 과장의

퇴사 모습과 당시 어수선했던 사내 분위기를 설명하고 그 사이에서 내가 느낀 바를 토로하며 끝맺는 흐름. 한마디로,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겪었던 혼란에 관해 설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처음 만들어 놓은 뼈대에 살이 붙지 않았다. 아니, 살이 붙도록 애쓰지 않았다. 핑계는 많다. 이번 주는 유독 회사 일이 힘들었고, 기진맥진해 집에 오면 PC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압도되었으며, 토요일엔 몇주 전 엄마와 약속한 대로 용문 5일장에 다녀와야 했다. 그러니까 이번 주는 일상을 ‘사는’ 일과 일상을 ‘적는’ 일 사이에서 계속해서 전자가 이긴 셈이다.






더구나 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버릇도 글쓰기를 미루는 데 한몫했다. 두 장의 분량을 채우기 위해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하루를 통으로 날려버린 기억이 많아서 책상에 앉는 일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

다 맞이한 일요일 저녁.






이럴 때면 어김없이 자책감이 들고 만다. 한 주에 글 하나 정도는 거뜬히 완성할 거라 굳게 믿었던 4주 전의 내가 허망하게 사라진 것 같아서다. 초심이

희미해지자 자세마저 불량해졌다. 허리를 세우고 열의 가득한 눈빛으로 흰 페이지와 대면했던 3월 말의 나와는 다르게 현재는 의자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히고 무릎 위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올린 뒤 하품하며 글을 쓰고 있다. 한심하게도 머릿속엔 공지사항이라는 글감보다 어제 본 <눈물의 여왕> 김수현이 더 아른거리는 중이다.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직 나는 쓰는 기쁨을 회복하지 못했음을.

동시에 겨우겨우 한 페이지를 채우고 나니 깨닫는다.

다행히 ‘기쁘지 않아도 일단 쓰는 사람’에는 근접했다는 것을.








4주 글감 : 공지사항
매거진의 이전글 2와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