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번주도 매우+매우+매우 바빴다. 내가 가장 지키려고 애쓰는 루틴, 점심 후 산책도 며칠은 걸러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김밥을 사 와 모니터 앞에서 우걱우걱 먹으면서 문득 몇 가지 사실들을 깨달았다. 과거 영업인일 땐 외근을 하며 숨통이라도 돌릴 시간이 있었는데, 기술직의 세계는 그 정도의 여유가 흔치 않다는 것. 그리고 소규모 회사일수록 직원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무게가 육중하다는 것.
10년 간 사무직을 하며 내 나름대로 여러 모양의 분주함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는데도, 디자인업계의 바쁨은 어쩐지 그 결이 좀 다른 것 같다. 완주 없는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나의 디자인이 끝날 때까지 몇 차례의 수정이 계속되고 그 사이 새로운 디자인의 견적 상담과 일정을 점검한 후 확정이 되면 쉴 틈 없이 또 바로 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완결의 기쁨 같은 건 느낄 틈이 없고 나름 표현하는 업(業)'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공장에서 무언가를 찍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아마 회사에서의 디자인은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작업이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형식과 모양새를 갖추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내가 다니는 회사는 직원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기업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도 꽤 무거운 편이다. 나조차도 디자인 업무 외에 블로그 포스팅과 제품 사진촬영을 겸하고 있고 다른 직원들도 서로 결이 다른 업무를 동시에 소화하고 있으니까. 뭐, 작은 사업체에서 여러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도 이 정도의 혼잡함일 줄은 사실 예상하지 못했다. 엑셀을 만졌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손목 통증이 생길 줄이야.
이렇다 보니 특히 이번주는 퇴근을 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토록 원하던, 홀로 집중하는 근무 환경이 분명 충족되었는데도 어쩐지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이 만족의 지점은 아닌 것 같아서다. 업무 폭풍이 세게 지나간 후 허한 마음이 들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이 마음속 냉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일단 찾아볼 생각이다. 기술직 입문자로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업무적 난관인 건지 아니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접어두었던 조직 밖에서의 삶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인 것인지 계속 찾다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오겠지
흥
① 자연 속에만 놔둬도 만족하는 인간 둘.
이번 주 화요일엔 '완전한 맑음'을 경험했다. 날씨 얘기가 아니라 컨디션이 최고조에 다다랐다는 이야기다. 이게 가능했던 건 취향이 비슷한 친구와 함께 연차를 쓰고 첫 산행을 했기 때문이다. 계단이 단 한 개도 없는 데크길을 걸은 거라 산행이라기보단 산보에 가깝지만 뭐, 어찌 됐건 산에서 즐길 수 있는 유흥을 아낌없이 즐겼다.
눈길 닿는 곳마다 청량한 색들이 쏟아졌고 쉬어가라고 만든 정자에서 각자가 싸 온 간식도 야무지게 먹었다. 이어서 간 식당과 북카페까지 친구의 추천 스폿이 찰떡같이 내 취향이라는 점도 우리의 내적 친밀감을 더욱 높였다. 어찌나 좋던지 두 명의 파워 내향인들이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몇 단계나 올라갔던 것 같다.
자신과 결이 맞는 곳에선 몸이 신호를 보낸다고 하던데 나는 자연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산속에서 매끄러워진다.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2만 보 가까이 걸었으니 어림잡아 10km를 산책한 건데도 힘들기는커녕 웃음이 자꾸 삐져나왔으니 말이다.
INFJ와 INFP는 역시 자연 속에 놔두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진다는 걸 실감한 날.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다음 행복 코스는 인왕산으로 결정했다 :-)
② 익힘 정도가 훌륭한 프로그램
우연히 미용실에서 추천을 받아 알게 된 프로그램『흑백요리사』요리 자체에도 무심하고 요리를 다룬 프로그램에는 더욱 무감한 내가 요리 경연 프로를 이렇게나 흥미롭게 볼 줄은 몰랐다. 무슨 내용인지 살짝 맛만 볼 생각으로 1화를 클릭했다가 3일 만에 12화를 몰아보게 되었다. 그것도 몹시 호들갑을 떨면서.
명확한 계급 구조와 화려한 세트장, 거기에 캐릭터가 선명한 인물들이 예술에 가까운 요리를 선보이니 몰입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더라. 특히, 각 미션마다 요리사들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자질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거리를 둔 시청자 입장에서 경쟁 양상을 지켜보다 보니 어떤 태도와 마인드가 승부에 유리한지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