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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Oct 15. 2019

나를 위한 지옥

그리고 꿈에서조차 못하는 '다리되기'에 대한 서글픔의 감각

예전에 어느 웹툰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한 번 더 깨달았던 일이 있었다. <죽음에 관하여>라는 웹툰의 한 꼭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의 가족이 살해를 당한다. 그러나 살해자는 자신의 죄를 전혀 모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몰염치한 모습이었고, 남자는 억울함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이 남자는 신에 의해서 자신이 죽인 사람의 가족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고, 남자는 그제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의 의미를 깨닫고 회한의 눈물을 쏟는다. 요컨대, 자신이 저지른 죄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최고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목격할 때마다 그를 위한 지옥이 예비 되어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리고 그 지옥이란 죽기 직전처럼,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의 죄의 의미를, 온몸으로, 정말 온몸으로 깨닫는 것이었다. 그때 느끼게 될 자기 존재의 철저한 부정, 그것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평범한 얼굴과 평범한 표정으로 너무나 평범하게 저지르는 일들이 때로는 믿을 수 없이 잔인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추악한 것일지라도, 아무리 고귀한 것일지라도 세계는 동일한 품으로 받아들여준다는 사실은 견고했다. 나는 관념적인 지옥을 수백, 수천개를 만드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하였다. 그리고 언제고 나 역시 어느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천국이었던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는 지옥이라는 사실을 누차 겪으면서 조각난 천국과 지옥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몇 달 전에 <액트 오브 킬링>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면서 매일 양적으로 확대되기만 하였던 나의 지옥도에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영화는 1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말레이시아의 학살,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당시 학살을 주도한 암살단이 노인이 된 후에, 자신들의 업적을 영원히 기록하여 대대손손 알리기 위해서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놀라웠던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떠한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암살단의 리더였던 안와르 콩고가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을 죽였는지 재현해보이고 학살의 장소를 설명해줄 때는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학살자의 묘한 흥분과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하면서 살해당한 사람의 역할을 몇 번 체험하는 과정에서 콩고에게 심경의 변화가 엿보인다.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죽인 사람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당신은 영화 촬영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진짜 죽게 되는 것이었으니 더했겠죠. 라는 대답을 듣고 그는 말이 한참이나 없었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서, 안와르 콩고는 다시 자신이 하루에 수백, 수천 명씩 죽이던 장소를 다시 찾는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그곳에서 구토를 한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여기서 내가 목을 조를 때, 그 사람은 이런 기분이었겠죠."라고 모를 듯한 미소를 띠고 이야기하다가, 침묵하다가, 문득 구토한다. 내장을 다 쏟아낼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빈 구역질을 하다가, 끝내 무엇이라도 토해야겠다는 듯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구토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게 되면 속이 시원하리라 생각했다. 참깨를 꼭꼭 씹어 먹는 듯이 고소해서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장면을 보는 내내 나도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아내야 했다. 그의 붉은 구토가 끝날 때까지 나도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왜였을까. 왜 나는 그와 같이 나도 몰랐던 자신의 죗값을 치르듯이 토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안와르 콩고와 내가 갖고 있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그는 백만 명을 살해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죽였던 것은 '국가를 위협하는 빨갱이'였으므로. 콩고의 기준에서 그들은 '응당 그러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나 역시도 방향성만 다르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 많은 지옥을 준비했던 것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하는 죄 지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그들은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양심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감수성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으로 타인을 죽이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지옥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지옥을 만드는 나 역시도, '죗값을 치러야 하는 자들"을 분리해내고 있었다. 도덕적으로 그들이 고통받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안와르 콩고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온몸으로 깨달을 때, 나도 함께 내 '생각'의 의미를 온몸으로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준비했던 수 많은 지옥 중에서 가장 먼저 문이 열린 것은 나를 위해 준비했던 것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나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놀라운 말이다. 정말, 놀라운 말이다. 도대체 이 한 마디가 무엇을 넘어서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말이다. 여지껏 내 바람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었다면, 그것은 "아버지 저들을 벌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나이다. (그리고 저는 열심히 노력해볼테니 가능한 천국으로 보내주소서. 저렇게 몰염치하고 양심 없는 인간들과 이웃을 하고 싶지는 않사옵니다. 하지만 저는 양심이 있으므로 지옥에 가라고 하신다면 순순히 가기는 하겠지만 자제해주소서.)"라는 기도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쫌생이의 기도..더더군다나, 나는 내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있었던 것 같다.) 타인은커녕 스스로도 용서가 잘 안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많이 용서하고, 적게 미워하고, 그의 죄를 그의 것으로만 하지 않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 역시 지니고 살고 있다. 모순이지만 모순 아닌 것들이 없으니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다. 이러한 모순을 견인해가는 태도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신경림 시인의 시가 있어서 덧붙인다.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 억울해지지만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 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신경림, <다리> 전문



이 서글픔의 감각을 지니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첫번째의 것이고 최소의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지옥도일랑은 이제 전부 그만 두고, 모든 길을 천국으로 가는 우회로로 그리는 것에 천착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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