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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Jul 31. 2018

[읽고쓴다③] 검사내전(內戰)? 검사내전(內傳)!

<검사내전> 독후감

1. 내가 그토록 존경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이름.


살아생전 내가 가장 ”존경한“ 사람은 단연코 어떤 “검사님”이라고 말하겠다. 물론 그 검사님의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 그러나 불의(?)의 사건에 휘말린 친구를 위해 탄원서를 쓰며, 나는 부모님에게도 써 본 적 없는 “존경하는 검사님!”이라는 문구를 모든 문단의 첫머리에 넣었었다. “존경하는 검사님!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연구자의 미래를 생각하시어...”,“존경하는 검사님! 귀중한 시간을 내어 긴 글을 읽어 주셔서...”다시 생각해보니 전체 내용의 반 정도를 존경하는 검사님을 부르짖는데 할애한 것 같다. 그렇다. 공권력이란 사적 영역의 절대적 가치인 효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런 공권력을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심하게 휘두르는 검사의 내전(內戰)이라니, 무시무시한 암투와 검은 권모술수, 썩어빠진 검찰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가득한 근엄한 책이겠구나! 싶은 기대로 책을 펼쳐 들었다. 

존경하는 검사니뮤ㅠㅠㅠ....!!



2. 나쁜 놈들이 모이는 곳, 검사실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불현듯 듀이십진법을 떠올리게 되었다. (교육학의 영원한 아이돌인 듀이는 얼마나 천재였던지 도서관을 다니다가 그 유명한 장서 분류 체계도 만들었다.) 이 책은 사회과학의 300번대일까, 아니면 문학의 800번대일까? 1,2장은 800번대, 3장은 300번대에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검사내전(內戰)이었더라면 당연히 300번 대에 꽂혀야 하는 책이겠지만, 예상 외로 이 책은 검사내전(內傳)이었던 것이다. 작가가 줄곧 꼬집듯이 법률가들은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 책은 생생했고, 재미있었다. 
   가장 관심을 잡아끌었던 부분은 사기공화국 부분이었다. 1장을 읽으며 나는 넘실넘실 차오르는 인간혐오와 불특정 다수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몸을 떨었다. 검사실에는 세상의 모든 악랄한 놈들이 모였다. 특히나 대담하고 영리한 나쁜 놈들이 모이는 듯 했다. (더 무서운 점은 정말 더 대담하고 영리한 나쁜 놈들은 아예 검사실을 방문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큰 도둑은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채플린의 말이 문득 떠오르지만 이건 그냥 고양이가 친 타자입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쁜 놈들의 연대기를 읽으면서 내가 배운 것은 법은 범죄자들의 술수를 언제나 뒤에서 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범죄 피해를 법이 구제하는 경우는 드물며 안 당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강타당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흔히 하는 법적인 위협이 대개는 실제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깡다구(?)가 생기는 듯도 하였다. 


법대로 하라니..? 뱃재시죠.


   그러나 이 험악한 에피소드들 가운데에서 정수기 전문가의 이야기는 석과불식의 희망을 남겨주었다. 이 나쁜 세상에서도 좋은 사람이, 그것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그럭저럭 주변이나 데울 수 있는 검사면 충분하다”는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작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어른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사회라는 조직의 나사못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럭저럭 주변이나 데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작가의 마음부터, 직장을 잃고 내부고발자의 불명예를 무릅쓰고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거리 농성을 벌인 정수가 전문가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나사못들이 만들어낸 선의에 의해 살아간다. 생활형 검사가 검사실에서 한 사람 공부와 세상 공부의 결론은 나쁘고 거대한 세상이라고 해서 그 나사못까지 나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들렸다. 

3. 법의 미래 
   3부에서는 조금 더 법리적인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인공지능에 대한 것이었다. 법조인이 옹벽을 쌓고 지키고 있는 기득권의 가장 큰 명분은 법은 전문가인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붙잡힌 몰카범이 알고 보니 현직 판사였더라, 판사가 무슨 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더라, 라는 식의 기사는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에서 그 명분은 타당성을 의심받고 있다. 법의 집행에 개입되는 ‘인간적인 편견’이란, 사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체험을 해보지 못한 기득권의 폭력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내게 법조인이 하고 있는 일을 기술로 대체할 수도 있다는 이 급진적인 아이디어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실행 가능성을 떠나 법의 본질적인 한계를 명백하게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목민관이 아니라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다.”라는 장에서는 플랫폼 정부라는 아이디어가 새로웠다. 밀접한 연관은 없더라도 블록체인을 떠올랐다. 중앙집권적 기관의 권력을 해체하고 그것을 수평적인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 닮았기 때문이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이전까지의 중앙집중적인 사회가 기술을 바탕으로 수평적인 체제로 크게 변화할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을 뿐이다. 
   한편 사회가 수직적 중앙통제식에서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변화한다면, 새로운 개혁과 새로운 목민관이 변별되는 개념일지는 의심스러웠다.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 권력 구조, 교육개혁은 구조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아주 미시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한다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교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본질적 개혁’이라고 칭하고 있는 구조적 개혁과 ‘새로운 목민관’이라고 칭하는 개인적 쇄신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예로 들면 교육부가 2~3년에 한 번씩 교육정책을 바꾸어도 사람들의 마음 속의 경쟁 구도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현재와 같은 과도한 경쟁 교육은 계속된다. 우리 모두가 방법론적으로라도 개인의 쇄신이 구조적 개혁과 병행되어야지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기도 하다. 선의를 표방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입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근원적으로 교육이 경제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육사회학자인 번스타인의 분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교육이 경제에 예속되어 있는 사회적 통제의 사회질서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국민들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학교를 다니고 시험을 치르고 있다. 이러한 사회구조에서 교육은 자율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를 푸는 방법을 “본질적 개혁”이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것은 테세우스처럼 아드리아드네의 실타래를 단칼에 베어버리겠다는 것처럼 여겨진다.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4. 맺음말 
   검사는 분명히 주변에서 흔하게 만나는 직업은 아니다. 나와는 몇 억 광년 쯤 떨어진 세계 안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것은 늘 삶의 편폭을 넓히는 기회가 된다. 앞서 이 책이 듀이십진법에서 어떤 분류에 속할지에 대한 궁금해 한 바 있다. 분류 체계는 이미 엄정한 기준에 따라 정해져있지만, 실재는 그러한 송곳같은 관념 위에 터지지 않는 물풍선처럼 걸쳐 있게 된다. 모든 것이 가장 명명백백히 옳고 그름이 가려질 것 같은 법의 판단은 사실 분류 체계 같은 것이고 실재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며 법으로 재단되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명명백백한 것은 남의 등처먹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사회가 굴러가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생활형 검사든, 생활형 직장인이든 모두 나쁜 맘 먹지 말고 열심히 살자, 그리고 생각하며 살자는 진부한 마무리를 해야겠다. 그것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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