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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h Jan 28. 2023

2. 맑은 대구를 떠나 굳이 흐린 제주로

나의 젊음에는 최소한의 후회도, 일말의 아쉬움도 없도록.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모는 내심 내가 제주를 고집하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리고 자꾸만 아하핫, 하고 웃으며 말했다. 무모한 내가 멋있다고. 그런 내가 정말 많이 부럽다고. 겁 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네가, 기회를 만들 시간이 많은 네가, 젊고 생기 있는 네가 부럽다고 했다. 아하핫, 하는 웃음 뒤에 이어진 한숨에 사무치는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좋겠다- 하는 한 마디에 지나쳐 온 이모의 젊은 시간이 다 담긴 듯했다. 이모는 금세 지나가버린 이모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은 젊음이었다. 그저 시절마다 있었던 하고 싶은 것을 할 만한 정도의 자유만을 바랐건만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된 자식들과 애증 했던 남편과 외면할 수 없는 늙은 부모가 이모의 옷깃을 잡았다. 이모는 잡힌 옷자락을 벗지도, 뿌리치지도 못한 채 돌보고 챙기며 살았다. 그런 삶 중에도 이따금씩 자유가 기웃대긴 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대체 상냥하지가 않아서, 바라던 것을 해 볼 만하면 더 무거운 추를 매달아 이모를 붙들어맸다. 이제 이모는 무거운 옷을 몇 개 벗긴 했지만, 더 이상은 하고 싶은 것에 쏟을 힘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손톱만큼의 희망, 바닥난 용기,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낡아버린 몸뚱이, 낯선 늙음, 지친 젊음. 그것들이 이모의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이모는 흠! 하고 웃었다.


 이모는 어린이날이면 면지에 편지를 쓴 책을 선물해 주고, 특유의 상냥하고 위트 있는 어투로 모두를 즐겁게 하고, 어떤 일이든 노련함으로 쉽게 풀어버리고, 슬픔에도 담담하게 맞서는 멋진 어른이었다. 인사도 못 해본 이웃들을 향한 응원의 글을 엘리베이터에 써 붙이며 즐거워하는 용감하고 따뜻한 어른이었다. 이모 같은 어른이 되어야지, 다짐했던 나를 위해서라도 이모가 현실에 잠겨 가라앉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두 명의 인생을 장성시킨 이모가 못 할 일이 대체 무엇이겠는가.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이모의 마음 한편에 가늘게 살아있는 젊음을 북돋았다. 아직 포기하지는 못한 이모의 희망을 최선을 다해 응원했다. 내 응원에 이모는 “맞나. 내가 할 수 있겠나…”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충분히 나이 들어보지 못한 새파란 나의 최선은 이모에게 그다지 효력이 없는 듯했다. 젊게 나이 드는 것.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이모의 모습에서 실감했다. 이모는 내가 아는 어른 중 가장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새로이 다짐했다. 훗날 예순의 나는 한스럽게 아쉬운 것을 절대 갖지 말자고. 젊음의 생생함은 부러워하더라도,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는 말자고.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격렬하게 치열한 젊음을 살자고 다짐했다. 외면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젊게 나이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면, 차라리 젊은 때에 젊음을 완전히 소진해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젊음에는 최소한의 후회도, 일말의 아쉬움도 없도록.


 이모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그 애에게 다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고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륙 직전에 카톡을 하나 남겼다. [ 어쩌다 보니 비행기를 탔는데,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으려나? ] 곧장 전화가 왔다. “엥? 너 비행기 탔다고?” 반기는 기색이 덜 한 목소리였다. “응, 몰라 일단 가보려고. 어떻게든 되겠지 뭐.” 정말이지 대책 없이 용감한 나였다. “흠. 어쩌냐. 나 못 나갈지도 모르겠는데. 도로가 다 얼어서 차가 미끄러지라고.” 사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애써 실망을 감추며 대답했다. “헐! 그럼 어쩔 수 없지. 일단 갈게! 나 비행기 뜬다, 끊어! “ 그 애는 대답했다. “어 그래. 조심히 와. 공항에 내리면 연락 줘.” 아- 실망한걸 티 내고 싶지 않았는데, 실패한 것 같았다. 혼자인 여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애와 함께인 저녁 한 끼를 가장 기대했는데. 이내 비행기가 떠오르고 귀가 잠시 먹먹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실망도 삼켜냈다. 이 참에 온전히 혼자인 시간을 보내면서 유난히 아쉬운 스물일곱을 뜻깊게 보내주면 될 일이었다. 창 밖의 하늘은 눈구름이 걷혀 예쁘게 맑았다. 내 여행은 항상 뜻밖의 일들로 즐거웠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으니 더 기대해 볼 만했다. 벌써 설원에서의 여행을 한 차례 치른 터라 노곤히 눈이 무거워졌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짧은 잠을 잤다.


밤바다처럼 새카만 바다 위로 거품 같은 파도가 일고 있었다.

 

덜컹대는 비행기에 머리를 창에 통통 부딪히면서 선 잠에서 깼다. 눈을 떠 밖을 내다보니 끝없이 희뿌옇기만 했다. 하늘 위가 아니라 낮에 걸었던 눈 밭 같았다. 제주에 가까워졌구나, 알 수 있었다. 맑은 대구를 떠나 굳이 이토록 흐린 제주로 오다니. 그러고 보니 제주의 날씨는 언제나 내게 심술궂었다. 지난여름에는 제주에서 태풍 바비를 만났었는데. 이번에는 폭설이구나, 싶었다. 비행기는 점점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승무원의 구명조끼 시범을 좀 더 자세히 봐 뒀어야 했나, 하면서 벨트를 고쳐 맸다. 비행기도 경운기처럼 털털 댈 수 있음을 경험하면서 바다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밤도 아닌데, 밤바다처럼 새카만 바다 위로 거품 같은 파도가 일고 있었다. 내려다본 바다가 무섭기는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될 거야. 하면서 마음을 다잡으며 제주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모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혜진아, 첫 홀로 여행 응원해. 너는 뭐를 해도 괜찮을 나이잖아. 좋은 시간 되기.] 뭐를 해도 괜찮을 나이. 그래, 맞는 말이었다. 이룬 건 딱히 없는 스물일곱이지만, 아직 스물일곱이니까. 스물일곱의 말미에 어쨌건 아무 일을 벌였으니, 곧 닥칠 스물여덟에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겠지. 이번에도 이모 덕에 마음을 고쳐 먹으며 재해의 현장으로 용감히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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