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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h Jan 31. 2023

5.12월 30일, 에벤에셀 호텔 429호 에서 혼자.

우리는 어떡하지, 하면서 어떻게든 해내며 어른이 되겠지.

장하다 나 자신. 우여곡절 끝에 함덕 에벤에셀 호텔에 드디어 도착했다. 도움의 돌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에벤에셀. 기독교에서는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을 찾고선, 아! 여기다! 싶었다. 대책 없이 떠나게 된 나의 첫 혼자 여행의 유일한 믿는 구석이었달까. 아버지, 멋진 여행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방을 예약했었다.


이번 여행의 숙소를 정할 때 고려한 것은 두 가지였다. 공항에서 멀지 않을 것, 침대에 누워서 바다를 볼 수 있을 것. 지난여름 조천의 신흥리에 잠시 머물면서 둘러봤던 함덕 해변이 번뜩 떠올랐다. 버스정류장도 있었고, 식당도 많았고, 숙소도 많았고, 해변도 예뻤던 함덕. 완전히 낯선 곳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공항에서 3-4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도 큰 메리트였다. 비록 오늘은 4시간이 걸려 도착했지만. 참 다이내믹 하루였다. 이 모든 일이 하루 동안의 일임을 누가 쉽게 믿어줄까? 아, 시트콤 같은 내 인생.


버스에서 내려 대구에서는 겪어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강풍을 체험했다.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의미로 “삼다도”라고도 불린다는 제주. 지난여름에 태풍 “바비”를 제주에서 맞이하면서 키 큰 나무가 뽑히고 문이 뜯어지는 바람을 익히 경험하여 제주의 바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오늘의 제주 바람은 그것을 갱신했다. 마치 브레이크 없이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자전거처럼, 바람에 떠밀려 걸었다. 뭔가를 붙들지 않으면 가만히 서있을 수 없는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강풍에 인명 사고가 나는 일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경험이었다. 정말이지 자연에는 까불면 안 된다.


눈바람과 추위로 만신창이의 모습을 하고 호텔 프런트에 섰다. 체크인을 하면서 차량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하는 호텔 직원분의 물음에 버스 타고 왔어요... 하고 대답했다. 직원 분의 눈이 땡그래졌다. “어머, 눈이 많이 오는데.. 고생하셨겠어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아, 위로...! 오늘의 고생에 대한 첫 위로였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하루 종일 추웠던 제주에서의 첫 온기였다. 그 사람을 붙들고 그 간의 고생을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했지만  “네.. 너무 힘들었어요.. 감사합니다..” 하며 키를 받아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우당탕탕 좌충우돌 다이내믹한 나의 첫 홀로 여행의 밤을 위해 축배를 들어야야 했다.


2020년 12월  30일, 제주도 함덕 에반 에셀 호텔, 429호. 체크인을 하고 숙소에 들어왔을 때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해냈다. 내가 해냈다. 안도감과 묘한 성취감이 들었다. 짐을 던져 놓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제야 배가 고파왔다. 배가 고프다는 것을 인식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이미 열 시가 넘어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많지 않았다. 어마 무시한 강풍을 뚫고 먹을만한 것을 찾으러 나가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로 아래에 있는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먹을 생각으로 내려갔다가, “컵라면이나 먹게 될걸?” 했던 이모의 말이 생각나서 몇 걸음밖에 있는 치킨집에 가서 치킨을 포장했다. 우당탕탕 좌충우돌 다이내믹한 나의 첫 홀로 여행의 밤을 위해 축배를 들어야 했다. 포장한 치킨을 받아 들고 편의점으로 다시 가서 먹고 싶은 것을 다 샀다. 두 손 무겁게 숙소로 돌아와서 거나하게 상을 차리고,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냈다. 내가 이렇게나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다고. 사진을 본 엄마는 굳이 눈보라를 뚫고 가서 청승을 떤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좋았다. 오늘의 믿을 수 없이 다이내믹했던 일과를 자랑하고 싶어서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나 제주도다!” 하면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친구들은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르며 살아 돌아오라고 응원해 줬다. 모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용감하고 무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괜히 웃음이 났다. 눈보라 치는 제주의 바람을 이겨내고 호텔 방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치킨을 먹는 나라니. 짠하고 멋진 이 모습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내가 혼자 제주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라라구가 기쁜 소식을 전해줬다. 라라구의 사촌오빠와 그의 친구들이 제주도에 있다는 소식! 다행히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지내는 사이라, 여차하면 그들에게 빌붙어 폭설이 온 제주를 여행해도 될 일이었다. 길 한가운데에 멈춰버리는 버스와 오매불망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택시를 경험한 뚜벅이 여행객인 나는, 호텔 주변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뜻밖의 알찬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 기동력이 생겼으니 하루 더 제주에 있으면서 2021년 1월 1일을 맞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일에 대한 근심이 덜어졌다. 아, 역시 에벤에셀의 이름을 믿길 잘했어. 도우시는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이렇게 도우실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치킨은 반도 못 먹었고, 욕심껏 사 온 술과 컵라면은 뜯지도 못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혼자 먹다 보니 금세 배가 불렀다. 남은 음식은 내일 먹어야겠다, 하면서 테이블을 벗어났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니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 등 따시고, 배부른 이 기분. 오늘의 고생이 다 씻겨 내려갔다. 행복했다. 따뜻한 물줄기를 한참 맞고 있다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잠옷도 챙기지 않았다. 팬티 바람으로 침대 위에 앉아 이불을 둘러매고 노트북에 오늘을 써린다. 짐이 될 것 같아서 가져오지 않으려다가 혹시나 하면서 챙긴 노트북.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


나는 두 가지 경우에만 일기를 쓴다. 너무 끔찍한 날을 보냈을 때, 너무 완벽한 하루를 보냈을 때.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 것 같지만, 오늘은 두 가지 모두 해당되는 날이니 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됐다. 2020년 12월  30일. 아무 일도 없이 심심한 스물일곱의 마지막이 서러워 결심한 하루. 이 정도의 아무 일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무 일이 많았던 하루. ‘어떡하지’와 ‘어떻게든 되겠지’의 반복이 계속됐던 하루. 고생 끝에 낙이 온 하루. 아주 보람차고 적당히 쓸쓸한 하루.


결항된 비행기 순응하고 오늘을 포기했더라면, 편하긴 했겠지만 후회가 많이 남았을 테다. 고생보다 후회를 겁낸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결심을 실행하지 않는 내가 싫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올 해의 1월 1일에 결심한 일들이 여러 개였는데, 그중에 실제로 이룬 것은 없었다. 1월 1일의 결심 중 하나라도 이룬 것이 있었다면 스물일곱을 보내는 것이 덜 서글펐을까. 이제는 실행하지 않은 것에 애써 핑계를 찾으며 스스로를 안일하게 만드는 짓을 그만해야 한다.


10대에 떠올린 스물일곱의 나는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남편도 있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막상 스물일곱이 되어보니 그런 것들을 다 갖기엔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였다. 아직 10대의 내가 생각했던 어른 같은 어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하나도 갖지 못했기 때문일까. 스물일곱이 된 나는 스물일곱을 보내기가 너무 싫었다. 스물일곱까지는 이십 대 중반이라고 우길 수 있었는데 스물여덟은 중반이라 우기기엔 양심이 없다. 20대를 거의 다 지나왔는데도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 "네가 보고 싶어."라는 책임감 없이 달콤한 헛소리에 온 마음이 흔들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무작정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고, 나를 보러 오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이 다쳐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었다가, 펑 펑 내리는 눈에 또 금세 다친 마음을 잊어버리는, 조심성 없고 무모한 어린아이 같다.


스물여덟이 되면 좀 나으려나. 어른인 척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모르긴 몰라도, 오늘을 이렇게 마치고 보니 언젠가는 나도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떡하지, 하면서 어떻게든 해내면서 어른이 되어갈 것 같다. 모두가 이렇게 얼떨결에 어른이 되는 거겠지. 닥쳐온 인생의 문제들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하면서. 어쩌면 나는 오늘 조금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2020년의 끝에 눈보라 치는 제주에서 나의 애틋한 스물일곱을 배웅한다. 오롯이 혼자서. 2020년 12월 30일, 함덕 에벤에셀 호텔 429호에서 혼자, 이렇게 오늘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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