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쌀씨 Oct 25. 2018

6. 엄마가 집을 나간다

회전목마는 혼자 돌지 않는다

나의 시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고 대략적인 급박한 상황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다시 육아에 전념하던 어느 날.

내 인생에서 무척 가까운 사이이나 또 한편으로 머나먼 사이었던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의 작은 이모, 명순 씨였다.

어렸을 때는 호걸형 인간인 그녀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려서는 오빠들과 위아래 자매들 사이에 치여 -본인 주장으로- 매우 불공평한 삶을 살았으며, 결혼해서는 무려 아들 쌍둥이를 자연 분만하여 워킹맘으로 살아온 만랩 용사다. 남의 눈에 초년운이 다소 박해 보일만큼 강제 파이팅이 넘치는 삶을 사셨던 명순 씨는 자체 파이팅을 가슴에 품고 각종 공부에 매진하여 화려한 중년을 보내고 계신다.

여하튼, 그런 그녀의 용건은 간단했다. 노인을 위한 미술치료 강사로 활동하는 그녀는 동시에 해당 자격을 교육할 수 있는 자격 또한 갖추고 계셨는데- 그 수업을 들어보라는 제안이었다.

사실 처음 받는 제안은 아니었다. 외가댁에 놀러 가 몇 번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마다 애 좀 키워놓고 생각해보겠다며 넘겼던 나는, 사실 노인복지와 관련된 직업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 새끼 말곤 애도 싫은 마당에 노인이라니. 내가 그림 쪽 공부를 했는지라 제안을 하셨겠지만- 여하튼 전혀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장르였던 것이다.

명순 씨의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이전보다 이 공부를 진지하게 고려중이라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나는 누워있는 시할머니와 그녀의 사건사고들을 수습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내 인생에서 노인과 그토록 많은 시간을 접촉해있던 것은 그 순간이 처음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시할머니의 건조하고 주름진 손가락을 쥐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별로 불편하지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바로 수강신청을 했다. 무려 마포였는데도.

서울 최 북단 끄트머리에서 사는 나에게 마포는 멀었다. 더군다나 아직 아들이 어린이집에 입소하지 않은 상황. 이미 이모와 말을 맞춘 친정엄마는 수업시간 정도는 아이를 봐주겠노라 선언하셨다. 주부로 살기엔 딸이 너무 돈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크다는 사실을- 나의 엄마는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마침 신이 내 편이었는지, 친정집 아래층에 사는 나의 올케가 일을 그만두었다. 어린이집 교사의 과도한 업무로 인해 몸 여기저기가 삐그덕거려 휴식기를 가지기로 한 참이었다. 그녀는 본인의 시어머니가 가게일로 바쁘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바쁜 때에는 본인이 내 아들을 돌보겠노라 손을 내밀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외손주 홀릭 친정엄마와 국가가 공인한 유아교육자에게 아들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

무려 6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타고 신당역에 내려 친정집에 아들을 놓고 마포에서 두 시간짜리 수업을 듣고, 다시 신당역으로 와 하룻밤을 잔 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코스를 반복했다. 우리 집은 초역세권으로 길만 건너면 바로 지하철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역 하나를 걸어갔다.

나에겐 방풍커버를 씌워 쉽게 접을 수도 없는 유모차를 탄 우량아들이 있었고 우리 집 앞 역은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엘리베이터가 없는 역이었기 때문이다. 역무원에게 몇 번 도움을 청해 계단을 올랐던 나는 더 이상의 민폐가 수치스러워 역 하나를 걸어갈 것을 각오했다. 그것도 롱 패딩이 급 유행을 탄 혹한기에. 우리 동네는 산 아래라 특히나 춥다. 그해 나는 얼굴이 찢어지는 줄만 알았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지시스템이라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인생 베프 Y를 꼬셔 함께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지하철 한복판에서 모든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역시나 내 아들을 친조카급으로 사랑해주는 그녀 덕에 아이와의 지하철 이동은 언제나 순풍이었고,

그렇게 내 평생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애 엄마 하나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성인 3명의 도움과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필요했다.


복지라는 것이 좀 그렇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존재가치가 0에 가깝다.

하지만 동시에 100의 복지가 주어져도 큰 노력을 기하지 않으면 20도 써먹기 힘들며, 설사 다 써먹는다 하더라도 감사한데 아쉬운 것이 복지다. 일단 우리나라 복지는 그랬다.

그래서 복지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배려해줘야 하는지 의문과 불만을 가진다. 또 복지가 절실한 사람들은 왜 내게 맞는 복지가 없는지 소리친다. 보편적 복지란 것은 결국 구멍이 생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구멍에 빠져서 죽거나 슬프거나 힘든 자들을 보며 이 나라의 복지가 엉망이라고 지적한다.

재밌는 점은 복지가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는 것들에 무척이나 많은 보편적 복지가 섞여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복지가 절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러한 입장이 되었을 땐 복지가 너무나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답도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애엄마들이 너무 감상적이라고 평가한다. 맞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하며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이성을 잃고 감정에 치우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그 불쌍한 대상자이기 때문이다.

애 엄마인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편한 외출, 편한 이동, 편한 생활이 가능하다.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 있겠냐만은- 그 도움의 무게와 가치가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것이 바로 임신 출산 육아가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사회생활이 가능한 대한민국의 건강한 젊은 여성이 본인이 스스로 해내던 모든 일들을 어떤 도움이 없으면 해낼 수 없을 때의 충격은 상당하다. 감히 장애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비장애인이 얼마나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정도는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이랄까.

여기저기 아프다면서 저 여자는 왜 저 큰 애를 지고 다니는 걸까. 유모차 끌고 편하게 다니지. 아프다는 것도 다 그냥 앓는 소리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던 처녀시절의 나를 뚜드려 패고 싶다.

허리가 아작 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모차보다 아기띠를 매고 다니는 것은 그나마 비장애인이 누리는 무결한 불편함에 최대한 가까워지기 위한 몸무림이었다. 처녀 적의 바보 같은 생각은, 유모차는 휠체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바퀴 달린 물건에 보호자가 생긴다고 이동의 자유도가 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맘때 시할머니가 휠체어를 타실 수 없게 되었다. 요양병원 생활로 근육이 다 빠진 노인은 그 작은 바퀴 의자에도 앉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나란히 자리한 침대들 사이에서 그녀는 뒤집기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처럼 천장만 바라보았다. 내 아들은 제법 걸음이 빨라져 더 이상 무릎보호대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개월 수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안정기를 맞이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5. 어느 경단녀의 설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