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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13. 2024

게으름의 겨울

 어떤 게으른 이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희망이란 걸 품었다. 그 희망은 일찍부터 우울을 먹고 자라, 죽일 수도 없을 만큼 강인하고 튼튼한 몸집이 되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제 안에서 자라난 우월감은, 온라인 속 세상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깎아 먹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만 빼고 점점 더 대단해지는 것 같아서, 오히려 나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작 본인은 본인의 육체와 심신을 강인하게 길러낼 줄은 모르면서, 아주 대단한 사람인 양 이를 드러냈다. 그렇게 으름장을 놓아야만, 이룰 수 없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으니까.

 으르렁대던 이는 타인의 시선을 수용할 줄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도 누군가에게는 화살이 되었고, 그 화살은 또 아무렇지 않게 애꿎은 이에게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창살에 모두가 한 번씩 마음의 몸살을 앓는 동안, 그 누구도 상처를 준 일에 대해서는 되돌아보지 않았다. 상처받은 것에 대해서만 기억할 뿐이었다.

 옹졸함에 피어난 이기심은 시기와 질투가 되어 삶을 더욱 황망하게 만들었다. 계절은 점점 겨울로 치달아 회복할 수 없는 빙하기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사랑하는 이에 대해 성실했다면, 우리의 실수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게으름이 용납될 수 있는 똑똑한 시대라서, 어차피 말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라서, 결국 우리 모두는 제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접어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타오르고 소진되는 시대라서, 용서도 이해도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상처 주는 것에 대한 이 모든 시초가 게으름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사려 깊은 마음,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조차 꼼꼼하게 신경 쓰지 못한 나의 부주의이자 대충 살아도 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세상은 이제 개인의 삶을 존중하기 시작했고, 이는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 대한 성실함을 외면하는 게 되어 버렸다. 불성실하게 살아도 된다고, 열심히 살아봤자 의미 없다고, 오히려 인생 전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이끌고 갔다. 누구보다 열심히 산 나의 지난날들을, 덧없는 것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덧없는 시간이 어디 있으랴. 방황도 언젠가는 큰 깨달음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게으름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도, 상처 주는 언행도 마찬가지다. 정말 내 인생을 사랑한다면, 내 인생의 곁을 함께 가는 모든 이들도 사랑해야 했다.

 언제부터 세상은 게으른 자에게 관대했던 걸까. 그건, 그동안 모든 것에 열심히 아등바등 살아온 사람들에게 해당한 말이었다. 불필요한 것들까지 완벽주의로 해내려고 했던 자들, 자신의 인생이 아닌 세상을 사랑하고 싶었던 자들, 결국 정작 “나 자신”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그런 이들에게 삶을 조금 여유 있게 돌아보며 진심으로 나의 인생을 사랑해 보고 돌아보라는 말이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마치 게으름에 대해 일종의 정당성을 쥐어준 것 같다. “나”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내가 먼저이기 때문에 타인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아야 한다는 듯 말이다. 결국 배려도, 사랑도, 조그마한 성실만 보태면 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리는 일, 나의 사람들이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화분 하나 보내는 마음, 누군가 슬픈 일을 겪었을 때 곁에서 술 한잔 기울여주는 시간들.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 중에서도,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조차 용기를 내어해야만 하는 일들이 되었다.

 최선을 다하라고 하지 않겠다. 이미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인생의 한 부분을 살아봤고, 거기서 지쳐 쓰러져도 보았으니 말이다. 다만, 이제 더 이상 게으름에 무뎌질 수는 없다. 사랑하자. 지치지 않을 만큼. 후회하지 않을 만큼. 내 인생에서 여유는 게으름이 아닌 사랑에서 오는 것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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