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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Apr 21. 2024

몸살


 밤새 몸살을 앓고 일어난 새벽. 아직 좀 더 잠을 자도 괜찮은 새벽 4시에,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떴다. 열이 돋아나 가려운 얼굴과 몸을 긁으며 한숨을 쉰다. 네가 내 곁에서 미소 짓고 있는 악몽을 꿨다. 현실에선 이뤄질 수 없으니 이젠 지독한 악몽이 되어버렸다.

 하루가 무척 길다. 하루가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나는 네 생각만 수천 번을 했다. 나의 상상 속에 너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면서, 내 앞에 몇 번이나 어른거렸다. 때론 함께 했던 추억도 떠올리기도 하고, 함께 하고 싶었던 것들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너와 손을 잡는 모습도, 꼭 껴안아 우는 모습도, 가볍게 입을 맞추는 생각도 해봤다. 너의 얼굴만 몇 번이나 떠올려서일까? 이상하게 나의 하루는 무척이나 더딘 일주일처럼 느껴졌다. 하루가 길다. 어서 빨리 그리움의 하루들이 쌓여야, 네 모습도 점점 더 뿌옇게 될 텐데. 선명한 네 모습을 떠올리는 지금의 시간들이 무척 괴롭다.

 지난 사랑을 이야기하자면, 그 감정을 끝없이 펼쳐낼 수 있을 것이다. 남겨진 이의 감정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가 내뱉은 말이 가시가 되어, 결국은 내 탓이노라 자책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끝나버린 사랑에는 어떠한 책임도 남지 않았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을 찾아, 새로운 사랑을 하며, 새로운 책임을 만드는 것이 그동안 사랑의 이치였다.

 시간이 흐르면 금세 잊힐 것이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 특별하다고 여겨질 감정도 무뎌지게 될 테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내 감정은 하루에도 몇 천 번씩 요동쳤다. 덮어버리고 잘 살겠다고 머리를 젓다가도, 또 금세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헛된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라며 나 스스로를 다독인다. 지금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책임'이라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완벽하게 너의 곁을 떠나는 것, 나는 최선을 다해 너에게서 도망치려 할 테다.

 나를 잊어버렸느냐고, 그래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연락도 답장도 하지 않는다고 묻는다면, 나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이게 내가 너에게 전하는 마지막 사랑의 방식이라고 할까. 또 언젠가, 내가 참지 못하고 너에게 먼저 연락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네가 나를 피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안다. 우리의 관계는 늘 그랬다. 맞춰질 것 같으면서도 맞지 않는, 애석하지만 우리의 타이밍은 늘 그렇듯 어긋났으니까.

 땀이 젖은 이마를 훑는다. 오늘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차라리 완벽한 소나기가 내렸으면 어땠을까. 그럼 나도 완벽하게 너를 끊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몸이 뜨겁다. 온몸이 가렵고, 욱신거린다. 그런데 마음은 텅 비고 공허해서, 나는 한참 웅크린 채로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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