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리대로 흘러갔다. 애초에 운명을 거스를 힘 따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용기란, 불변하는 확고한 힘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바람 앞에 놓인 등불이라도,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면, 나의 희망이 꺼질지언정 온몸을 다해 당신에게 나의 영혼을 다 바쳤으리라.
운명을 가지고 재고 따지는 것은 대단한 신도 아니요, 오직 하찮은 인간의 알량한 감정뿐이라 나는 사실 우유부단한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나 따위가 어찌 감히 흘러온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자신감 없는 마음에도 욕심이란 폭풍이 불어닥쳐, 나는 때때로 헛된 희망과 꿈을 품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찾아, 마치 이 믿음만으로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을 만져볼 수 있다는 듯이, 아주 자신감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이 사랑만은 불변할 것이오!라고.
어쩌면 나의 사랑은 다르리란, 누구나 할 법한 뻔한 말로 나의 감정에 채색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랑의 색깔이 그저 빨간 것이 아니듯, 어쩌면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사랑의 색깔은 파란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리도 멍울지고 아프기만 할까. 피가 차 볼록 부어오른 멍자국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언제 찧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영혼은 온통 멍투성이었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너른 나의 아량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비뚤게 걸어와버린 것 같다. 누구보다도 엄격했던 나의 세상에는 '그래도 괜찮다'는 말은 없었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랬다. 그랬던 내가 어떤 사랑에 취해 '그래도 된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그려왔던 나의 신념과 가치관은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완벽의 틈은 그렇게 벌어졌다. 나는 물이 고여 썩어가는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운명을 거스를 수도 있겠다고, 마침내 찾은 사랑에 악마에게 내 영혼을 팔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마음가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살아온 나의 세월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충돌은 대우주 속 행성과 행성의 충돌처럼 묵직했다. 나의 내면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빈틈을 보이기 시작해,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나 자신과의 갈등은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고, 이내 마침내 흘러넘쳐버리고 말았다. 나는 폭발하듯 당신에게 "다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노라" 소리쳤다. 사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목적지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올바르게 흘러간 적이 없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순간 죄인이 되어, 나의 세상 속에서 몇 번이고 찢기고 버려졌다. 나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으니, 세상 앞에 당당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내가 세운 나만의 가치관이 될 수도 있었고, 어쩌면 세상이 내린 정의일 수도 있다. 당신이 말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었던 건 아닐까. 나는 그동안 진심 어린 사랑을 하고 싶다는 나의 욕심으로 무너져버린 내 지난 가치관을 다시 세워야만 했다. 진짜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운명에 순응하며 만들어왔던 나의 가치관이란 틀 안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것 아닐까. 훗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용서하는 때가 온다면, 그때 나의 모습은 더 당당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부디, 당신이 나를 용서한다면.
사랑은 그렇게, 내가 살아온 모든 인생을 저버리게 만들 만큼 무색한 힘을 갖고 있다. 왜 우리는 사랑 앞에 무너져야만 하는 걸까. 어떤 사랑처럼 내면을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 순 없을까? 날더러 엄격하고 보수적인 인간이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다. 이게 수십 년을 만들어 온 내 모습이고, 나 자체니까.
어떤 감정 때문에 마음이 휩쓸려서 우유부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는 이제 버려야 한다. 오히려 그 우유부단한 기질이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으니까. 더 확실할수록, 더 나아질 수 있고, 또 지킬 수 있다. 나의 인생도, 당신의 인생도, 우리 모두의 소중한 시간도. 오히려 '좋은 사람'이란 그런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