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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Jul 18. 2022

주간 영화

2022.07.09-2022.07.15

<토르: 러브 앤 썬더(Thor: Love and Thunder)> (타이카 와이티티, 2022)


십수년 간 쌓아놓은 MCU 프랜차이즈의 영향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상당히 게으른 방식으로 효율을 챙기려고 한다. 아니 다시 말하겠다. 타이카 와이티티는 그냥 MCU를 재료 삼아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다. 굳이 이어지지 않아도 될 서사를 덧붙이고, 전개에 필요도 없는 가오갤 멤버들을 병풍처럼 소모하는 것에 관해 옳다/그르다를 논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이 과연 영화를 위한 최선의 선택일지, 혹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말을 얹어볼 수 있겠다.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이어지는 '전복의 쾌감' 혹은 '위트 있는 풍자'가 이 영화에서 얼마나 잘 작동하고 있을까? 이 영화는 전형성을 해체하려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같은 작품 속 오프닝 시퀀스만큼의 전복적인 쾌감을 끌어내지도 못한 채, 그저 수많은 레퍼런스들과 함께 표류하고 있다. 제우스를 가볍게 소비하는 방식은 통상의 전형성과 거리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토르가 제우스를 대하는 방식은 신 도살자 고르가 신을 대하는 방식과 오버랩되면서 의미 부여 혹은 서사적인 얼개로써 기능한다는 점이 문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토르와 고르는 거울처럼 서로를 맞대고 있으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제인 포스터와 고르의 딸로 인해 상당히 안정적이고 고전적인 서사 구조가 구축되는 셈인데, 이런 서술 방식을 굳이 B급 병맛 짬뽕 블랙코미디 코드로 포장해냈다는 점이 신기하면서도 쓸데없는 짓이 아닌가 싶다.



<곡비(哭悲)> (롭 자바즈, 2021)


<곡비>는 추악한 본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렸을 때의 파국을 나열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디까지 묘사할 것인지에 대한 창작자의 고민이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가령 신체를 훼손하는 몇몇 구간에서 <곡비>의 카메라는 일부러 그 지점을 비추지 않거나, 타이트한 클로즈업으로 전체 형상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어 공포스러운 질감을 완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균질함이 오히려 <곡비>를 흥미로운 영화로 만드는 것 같다. 최대한 자극적인 쾌감을 관객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입하고는 싶지만, 한편으로는 금기의 영역을 건드리고 해제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창작자의 무의식적인 두려움 혹은 머뭇거림이 공존하는 셈이다.


<곡비>가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이런 혼란스러움이 영화 자체에 짙게 배어 있다는 점인데, 그래서 이 작품은 현실이 될 수도, 영화가 될 수도 없는 이상한 결과물로 자리잡는다. 리얼한 질감의 혈흔과 말도 안 되는 수류탄 풍자가 공존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괜히 폼 잡는 영화들보다는 조금 덜 위선적인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됐건 <곡비>는 세계의 전체를 묘사할 수도 없고, 세계의 일부분을 추출해 현미경을 들이밀 수도 없다. 대만의 한 도시를 비추는 롱 숏으로 시작한 영화는 좁디좁은 철창에서 한 사람을 클로즈업하면서 끝난다. 밖에서 안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급격하게 변화된 <곡비>의 세계는 그저 과격한 문법에 의해 전체와 부분을 오가는 어떤 이질적인 진동 상태에 놓여 있다.



<밤 저편으로의 여행(夜を越える旅)> (가야노 타카유키, 2021)


이 기묘한 체험(혹은 망상이든 무의식의 발현이든 뭐든 간에)이 왜 찾아왔는지를 따져 보는 게 중요할까? 아니면 주인공 하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게 중요할까? 그러니까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면,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인과의 사슬을 촘촘히 덧대는 데 매달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정에 집중하고 있는 것인가. 영화는 후자에 가까운 전략을 택했고,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극중극...의 반복을 통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서사의 비틀기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방식을 통해 어쩌면 우리는 창작자의 심연 혹은 고통을 슬쩍 엿볼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그날의 죽음, 그 사람의 아픈 사연 같은 것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관객들이 삶에 신음하는 권태로운 만화가 지망생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체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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