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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Jul 12. 2022

주간 영화

2022.07.02-2022.07.08

<멘(Men)> (알렉스 가랜드, 2022)


그는 죽음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죄책감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복해서 그 앞에 나타나는 자들은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가스라이팅을 서슴지 않으면서 이 사람의 마음을 붕괴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벌어져야 하는가? 결국엔 흔적이 남고, 시간이 경과한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모든 경험의 진위 여부를 우리는 가릴 수 없다. 영화는 이 체험이 실제인지 허구인지 그 속성에 관해 지시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객에게 노출되는 당혹스러운 순간들, 즉 하퍼가 겪는 모든 사건들을 과연 우리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하퍼가 당황하는 이유와 관객이 당황하는 이유가 똑같은 현상에 의한 것이 확실한 걸까?


하퍼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형상들을 두고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게 과연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명쾌한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얼마간 하퍼가 의문을 표하는 모습이 묘사되고는 있어도, 하퍼가 관객들만큼 당황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현상 자체가 관객에게 더 유의미하게 작동하는 것이라면? 하퍼가 겪는 체험은 영화 내적 세계에 존재할 수 없고 관객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퍼의 심리에 관객이 접근하기 힘들어지는 셈이다. 아니 영화는 그 접근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퍼가 처음 그 존재를 마주했을 때를 떠올려 본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을 포기한 채 멀찍이 그 형상을 응시한다. 하퍼는 그를 보고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는 대신, 급하게 고개를 돌려 버리고 자리를 뜬다. 이후 같은 존재를 마주할 때마다 하퍼는 애써 외면하거나 회피하려 들기만 할 뿐, 극단의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하퍼와 관객에게 다른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데, 하퍼가 이 자가 누군지 짐작하고 있는 데 반해, 관객은 이 자에 대한 의심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 이 인식의 차이가 사라지는 순간은 언제 찾아오는가? 어쩌면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다시 말해 <멘>은 관객에게 있어서는 인과의 사슬을 추적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하퍼에겐 꽁꽁 싸인 마음의 짐을 풀어헤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두 갈래의 경로로 나뉘어 버린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은 어느 노선으로 영화를 따라갈지 잘 선택해야 한다.


관객된 입장에서 <멘>은 그 남자들의 온갖 형태가 지시하는 바를 곱씹어 보아야 하는 영화지만, 하퍼는 그들에게 드러나는 상징적인 면모에서 오히려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하퍼는 자신이 무엇을 직시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외면과 회피를 거듭할 뿐 진지하게 자신의 내면 상태를 돌아보는 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관객은 결정적인 그 시퀀스에서, 기묘한 광경을 마주하는 하퍼가 생각보다 직면한 상황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전히 관객과 하퍼가 수용하는 정보는 다르다. 관객은 플래시백 속 '맨'을 통해 '멘'을 보고, 하퍼는 '멘'을 통해 '맨'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 마침내 직시하고 남은 자리엔, 무엇이 남았는가. 흔적들이 진실을 보장해 줄 수는 없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퍼의 심리에 가까워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엷디 엷은 미소에 의지해 그를 헤아려 볼 시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청춘시련(青春弒戀)> (위 딩 호, 2021)


대략적으로 시퀀스를 시간 순행의 1~10으로 나눠서 봤을 때, <청춘시련>은 6~8/1~5/9~10 정도의 배분으로 시간대를 재편하고 있다. 이때 <청춘시련>은 같은 시간대를 반복해서 서술할 때, 처음에 드러나지 않았던 정보를 은근슬쩍 드러내는 식으로 인과 관계를 매만지고 있다. 이러한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밍량의 뒷모습을 찍은 숏이 두 번 나오게 되면 관객은 어떤 인상을 받게 되는 걸까. 위팡이 받은 문자의 정체가 제대로 공개되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걸까. 우선은 인물의 언행에 당위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 즉 인과성 확보만을 위한 편의적인 구성이라는 생각뿐이다. 뒤섞이는 시간대와 각 장이 인물들의 이름으로 쪼개지고 있다는 설정이 <청춘시련>을 아리송한 영화로 만들고 있는 것 사실이나, 이러한 영화의 선택이 빛좋은 개살구인지 내실을 채운 신의 한 수인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될 것 같다.



<베스퍼(Vesper)> (크리스티나 부오지테 & 브루노 샘퍼, 2022)


세트 디자인 혹은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의 질감 내지는 시각적 만족감은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눈을 사로잡는다. 그러니까 툭 까놓고 말해 <베스퍼>의 무대는 매력이 넘친다. 로케이션의 힘이 큰 것 같아 보이는데, 생각보다 효율적인 미장센을 선사한다는 점에선, 장르 문법에 충실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베스퍼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여러 시즌에 걸쳐 방영되는 드라마를 압축해 놓은 듯한, 캐릭터들을 도구처럼 손쉽게 소모해 버리는 특유의 전개 리듬 때문일까. 이곳의 생태계는 붕괴됐고, 식량 확보가 어려워 생존에 위협 받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베스퍼>엔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가 엿보이지 않는다. 이 무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때깔만 좋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기에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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