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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Jul 02. 2022

주간 영화

2022.06.25-2022.07.01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1)


남자의 사랑은 여자에게 통역되지만, 여자의 사랑은 남자에게 통역되지 않는다. 멜로 영화에서 두 사람 간의 감정 레이어가 어떻게 쌓이거나 사라지는지를 살피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면, <헤어질 결심>은 발화가 이뤄지지 않은/이뤄질 수 없는 감정을 발화하는 방식에 관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각종 스마트 기기들이 감정의 레이어를 재단하는 작업에 동원되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이 영화는 감정을 발화하는/감정이 드러나는 방식 자체를 감정(본질적인 의미의)보다도 우선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어로 발화된 서래의 음성이 번역기를 거치면 기계의 프로그래밍된 안내말로 재발화된다. 이렇게 재단된 디지털 정보가 해준에게 가닿을 때, 감정의 파고는 어떻게 형성됐다가 어떻게 확장/수렴/소멸되고 있는가.


<헤어질 결심>에는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던 두 사람이 급작스럽게 바짝 붙게 되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그 반대는 거의 없다. 그 도로를 떠올린다. 두 사람의 자동차는 서로 밀착해 있지만 두 사람은 결코 만날 수 없다. 그의 사랑이 끝날 때 그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에서는 절대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야속하게 엇갈리거나, 기껏 잘해봤자 스쳐가거나, '마침내' 마주쳐도 발화될 수 없는/되지 못하는 감정들이 맴돌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를 마주한다고 해서 서로의 모든 걸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 등의 기계가 매개물로 자리 잡고 있다. 단서를 잡은 해준은 등반을 통해 서래의 흔적을 따라간다. 고작 앱 하나에 의지하는 직감 수사지만, 이 과정에서 영화는 서래와 해준의 시공간을 포개어놓는 데 열중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둘 사이의 시공간을 억지로 연결해야겠다는 집착일지도 모르겠다.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헤어짐은 계속해서 유예된다. 반복해서 시공간을 접합하는 일과 감정의 발화 방식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작업은 어쩌면 그 결말을 유예시키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지.



<버닝> (이창동, 2018)


<버닝>은 과연 실체가 없는 무언가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서려 있는 영화일까? 이창동의 영화에서 그간 주체-대상의 관계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시종 질척대면서도 구체화되어 있었지만, 과연 우리는 <버닝>이 그로부터 멀어진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저 시대의 흐름이 반영됐다고 해서 <버닝>이 불가해한 미스터리를 극 곳곳에 뿌려놓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버닝>에서 중요한 질문은, '그들은 왜 오해하고 혼동하는가'가 아닐까. 그러니까 내게 있어 <버닝>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신음하는 영화가 아니라, 왜 이해할 수 없는지에 관한 탐색지대를 펼쳐놓으려는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


일산 신도시 개발에 밀려나다 못해 소멸했던 막동과 서울 근교 파주에서 뜀박질한 끝에 제자리를 맴돌다가 파멸로 향한(혹은 파멸의 수렁에 빠져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인) 종수는 결국 다를 바 없는 인물이 아닌가. 여전히 이창동은 그가 늘 말해오던 것들에 매달리고 있는데, <버닝>은 내적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만들면서 관객과 영화 사이를 갈라놓는 일종의 실험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 같다. <버닝>은 어쩌면 생각보다 단순한 것을 다루고 있지만, 구획화된 장르의 보법과 외피로 슬쩍 감싸놓은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오인과 혼동이 관객과 영화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 점을 감독이 의도했듯 하지 않았든, 아니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듯 말이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스스로 영화를 오인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인물이 인식하는 상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거되거나 사라진 정보를 기준점으로 삼으면서 인물들을 영화의 내적 세계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영화 내적 세계 곳곳에서 레이어가 쪼개지면서 새로 생성 혹은 소멸하고, 영화와 관객 사이 공유지대가 붕괴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질문을 떠올린다.  '그들은 왜 오해하고 혼동하는가?'. 아니 질문은 이제 달라졌다. '우리는 왜 오해하고 혼동하는가?'. 인물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방향을 바꿔 관객에게 되돌아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달려오던 기차를 역재생해 거슬러 올라간 영화의 시간이 관객의 시간과 어떻게 접합될 수 있는지를 탐색했던 <박하사탕>,  스크린에 급작스럽게 시구가 적힌 종이를 끼워 넣어 매체의 특성이 무엇으로 정의되는지 가늠해 봤던 <시> 등 기존의 사례들을 거쳐서 생각한다면, 사실 <버닝>에서 이창동이 진화했다거나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갔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이 든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버텨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런 이유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트윈 픽스(Twin Peaks: Fire Walk with Me)> (데이빗 린치, 1992)


태생부터 드라마의 설정과 세계관에 묶여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산만하게 흩뿌려진 조각난 에피소드들과 단서들이 지시하는 바에 매달리는 일이 딱히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트윈 픽스>는 지금 내게 어떤 모습으로 찾아왔는가. 흥미로운 사실은 <트윈 픽스>가 단일 주체의 시점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 영화는 다양한 존재들의 시점을 관객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트윈 픽스>는 초감각의 세계를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이 선택으로 인해 관객들은 관습 혹은 인과의 사슬에 묶여 있던 자신의 몸이 점점 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몸이 풀려나야 하는 것일까? 거기엔 이유가 없다. 반지가 어쩌니 밥이 누구니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감각을 뒤흔드는 경험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후반부에 차츰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 그를 통해 영화는 어떤 종착지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곳은 현실이 아니다('아닐지도 모른다'가 조금 더 정확한 워딩일지도). 그러니까 로라에게 영화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런 손길을 건넬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트윈 픽스> 역시 현실에 스며드는 대신 현실과 멀어지는 방식으로 로라에게 가닿고자 한 걸까? 결국 <트윈 픽스>는 사회의 환부를, 개인의 불안을 바라볼 때 장착하는 렌즈가 될 수 없다. 어쩐지 빨간 커튼으로 둘러싸인 그 공간을 그저 그렇게 내버려 둬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그들을 영화에서 꺼낼 수 없다. 로라는 그저 잔상처럼 깜빡일 때마다 우리들의 무의식에만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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