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8-2022.06.24
<탑건: 매버릭>에는 하나의 시간선이 있지만, 그 시간선이 여러 갈래의 시간선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제법 흥미롭다. 이곳엔 아이스맨의, 구스의, 매버릭의 시간들이 얽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의 시간이 영화에 침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톰 크루즈의 늘어난 주름이라든가 암 투병 후유증 영향으로 변해버린 발 킬머의 몸 상태 같은 것들이 영화의 타임라인에 침입해 내적 세계로 스며들어 있다. 이 같은 사례는 사실 <탑건: 매버릭>을 제외하고도 많다 못해 넘쳐흐르는 수준이다. 그런데 다른 사례들이 <탑건: 매버릭>에서만큼의 감각적인 파급력을 선사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어떤 점들로 인해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일까.
<탑건: 매버릭>엔 믿음이 서려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믿고 싶어 한다. 아직 지켜내야 할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누군가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신념. 영화엔 그 신념을 지키는 것에 관한 갈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OTT 시대에도 대형 스크린의 상영 환경을 확보하는 일이든, 톰 크루즈가 한결같은 자기관리와 퍼포먼스로 하나의 아이콘 내지는 브랜드가 되어가고 있는 과정이든 말이다. 배우가 캐릭터가 되고, 캐릭터가 서사를 꾸려나가고, 서사가 영화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유려한 연결점을 찾아낸 사례가 <탑건: 매버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지켜낼 수만 있다면 소통의 또 다른 가능성 혹은 기회가 자연스레 찾아올 수 있다. <탑건: 매버릭>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대한 믿음을 고수한다. 오히려 관객들에게 알아달라고 먼저 요청하는 것만 같다.
<마녀>는 김다미의 영화였다. 그렇다면 <마녀 2>는 신시아의 영화가 될 수 있는가. 될 수 없는 것 같다. 영화는 전편과 다른 방식으로 한 사람을 조명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관계성이다. 전편 속 구자윤의 태세 전환이 폭발력을 갖출 수 있던 이유는 그의 여정이 자기중심적인 구조로 설정됐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2편의 소녀에겐 기묘하게도 '나 자신'이 없다. 오로지 타인의 희생이 동반될 때에만 각성이 허락되고, 타인과의 유대를 형성해야만 삶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 지점에서 전편과 이번 편은 많이 다르다. 전편의 구자윤이 영화를 집어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주체가 스스로 설정한 관계 그 자체에 있었다. 구자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관계를 마음대로 재편하고 조정하는데, 이 과정에서 배우의 매력 등이 결합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좋은 방향으로 발현된 사례가 <마녀>였다.
<마녀 2>에도 물론 신시아 배우에 의존할 수 있는 선택지가 존재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을 무시했다. 좋고 나쁘고의 선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쩐지 영화가 가야만 하는 필연의 길을 저버린 느낌이라 아쉽다. 맥락을 소거한 채 존재의 아우라로 찍어누르려는 전략. <마녀> 유니버스는 이런 단순 무식한 구상에 치중하는 편이 좋아 보이는데, 엄마를 찾아 나서는 3편의 서사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