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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Jun 22. 2022

주간 영화

2022.06.11-2022.06.17

<애프터 양(After Yang)> (코고나다, 2021)


<애프터 양>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대상으로 하는 심도 있는 논의를 일부러 거부한다. 이는 제이크와 에이다의 대화 신을 통해서 확인된다. 양이 인간이 되고 싶었는지 궁금해하던 제이크에게 에이다는 그건 정말 인간 중심적인 생각 아니냐며 일갈하는 장면 말이다. 이 대화 장면을 벗어나면 해당 논의에 관한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다시 말해 <애프터 양>은 <블레이드 러너>가 될 수 없다. 영화는 양의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에 관한 모호한 스탠스를 덧칠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건 양의 정체성이 아닌, 양의 기억(내지는 기억처럼 여겨지는 무언가) 그 자체가 되는 셈이다. 물질적으로 감각되거나 실체화될 수 없는 관념 덩어리인 무언가가 극의 중심이 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관념이 영화보다 우선시되면 영화가 영화로서 존재하지 못한 채 도구처럼 변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간에 강박적으로 몰두했던 <테넷>이 좋은 예시다.


그런데 <애프터 양>엔 이런 위기가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애프터 양>은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근래 만났던 영화 중에 보기 드물게 새로운 감각을 환기하고 있다. 영화는 내내 기억(내지는 기억처럼 여겨지는 무언가)에 관해 말하지만, 그것이 서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획득하는지 영화가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애프터 양>은 서사의 목적지를 설정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 이는 원작을 얼마나 잘 각색해서 매력적인 이야기로 가공하는가의 문제와도 직결될 텐데, <애프터 양>이 구축해낸 기승전결의 흐름은 황당하다 못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애프터 양>이 특정한 구석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영화는 관객에게 조심스레 요청한다. '기억'이 다른 용어로 번역되길 바라는 것 같다. 이때 <애프터 양>이 매개 통로를 일부러 없앤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기억 저장소 판독 장면이 어째서 안경이라는 매개 통로가 일부러 지워진 형태로 관객과 직접 만나야만 했는가. 실재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이 물리적인 장벽을 초월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본연의 상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촬영본이 데이터로 변환된 뒤 다시 그래픽으로 구현된 뒤 우리의 눈에 가닿기까지의 과정. 여기서 <애프터 양>은 안경을 쓴 채로 기억을 재생하는 수용자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 대신 안경을 지워내는 일 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원래의 기억 형태는 무엇일까. 특정 지을 수 없다. 정의될 수 없는 관념 형태가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관객에게 제시될 때, 안경을 쓴 인물이 느끼는 것과 해당 장면을 보며 관객이 느끼는 것은 같아질 수 없다.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면, <애프터 양>은 곧 기억의 불완전성을 자연스레 무대로 끌고 오는 영화가 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오션스 8> (게리 로스, 2018)


'오션스 시리즈'에서 파생된 스핀 오프라는 점이 오히려 독이 된 모양새다. 왜 데비 오션이 오빠를 추모하는 장면이 꼭 있어야 하며, 왜 오리지널 시리즈의 곡예사 옌을 굳이 불러와야 했는가. 원작과의 연관성을 센스 있게 배치하는 것과 그것에 마냥 의존하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두 사안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가 아닐까. <오션스 8>은 그 지점을 영리하게 핸들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존재감 뚜렷한 배우들이 뿜어내야 하는 활력은 지난 오션스 일당이 미리 펼쳐놓았던 잔상에 묻혀 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과 산드라 블록을 투톱으로 내세우고도, 조력자 라인을 뛰어난 배우들로 채워 넣고도 이 정도의 텐션과 활기밖에 뽑아내지 못한다는 게 오히려 더 놀랍다.



<마녀> (박훈정, 2018)


"솔직히 기대 이상이네?"라는 대사를 김다미 배우가 뱉는 순간, 정말 묘하게도 소름이 돋았다. 만화책 귀퉁이에서 잘라낸 듯한 자윤의 얼굴 클로즈업, 애니메이션 속에서라면 훨씬 더 밀도 있게 연출되었을 법한 대사까지. 그러니까 이 숏은 카메라가 머리 뒤에서 움직여 얼굴 앞을 비추는 등 다분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어쩐지 영화 같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분절적으로 끊어지는 듯한 액션 연출이라든가, 직관적이면서도 살짝은 오글거리고 전달력 강한 대사들('알잖아 너하고 난 레벨이 달라', '느리네, 여전히' 등)을 통해서도 그런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마녀>는 말풍선과 장면으로 조합된 만화 혹은 애니 혹은 웹툰의 그 어딘가가 스크린에 들러붙은 것처럼 보이는 기묘한 결과물이다.


자윤은 어딘가 현실과 유리된 만화 속 캐릭터처럼 보인다. 자윤은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올 법한 강화 개조 인간 같은 아우라(정확히는 자윤을 연기한 김다미 배우의 아우라로 보는 게 맞다)를 풍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내뱉는 대사들에도 묘하게 그런 속성이 녹아들어 있는 걸까. 자윤을 설계한 감독의 생각과 의중이 무의식에 반영된 탓일 수도 있겠고, 배역에 대한 김다미 배우의 해석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마녀>는 영화면서 영화이길 포기하려고 한다. 제작 여건이나 예산이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물로만 보자면, <마녀>는 보여주기 보다는 말하기를 선택했고, 현실보다는 판타지를 선택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영화라는 기반 위에 이런 비영화적인 요소들이 조합되는 과정에서 기묘한 활력을 얻은 것만 같다. 장황한 대사로 앞뒤 맥락을 설명해도, 그런 구구절절한 설명이 어쩌면 영상화된 플래시백보다도 존재감이 뚜렷해진다거나 하는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주연 배우의 퍼포먼스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마녀>는 어쩌면 박훈정의 영화가 아니라 김다미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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