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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Jun 16. 2022

주간 영화

2022.06.04-2022.06.10

<브로커(Broker)>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2)


한국의 관객은 영화의 촬영지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부산의 한 교회 간판, 밀면 장사가 지겹다는 인물의 볼멘소리 등으로 잡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의 지형학적 구조나 지리적인 특성 등을 잘 모르는 해외의 관객에게 있어 <브로커>는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 정도로만 취급될 뿐이다. 오히려 이 영화가 동아시아 한구석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사실은 시나리오, 대사 교환 시의 분위기 등을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은 <브로커>의 지역성(로컬성)이 과연 영화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 걸까. 영화의 촬영지에 대한 당위성이 확보될 때 <브로커>라는 영화에 어떤 균열이 생기고 있는가. 그 사실을 따지는 게 중요하긴 하나? 굳이 부산의 한 교회라는 걸 은근히 티내는 도입부의 어떤 숏이 기억난다. 근데 부산의 교회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영화 속 지역의 색채가 그 어떤 지역의 것으로 대체돼도 상관이 없다면, <브로커>의 내적 세계를 지탱하는 논리의 구심점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시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에 직면하는지가 통상적인 서사의 기본 틀일 터인데, <브로커>의 장소성은 무엇을 지시하거나 표상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 머릿속에 질문들이 떠오르고 있다. 가령 이창동의 <버닝>이나 <초록물고기>가 그 지역에서 촬영됐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브로커>는 그 지점에서 과연 어떤 항변을 내놓을 수 있을까.



<초록물고기> (이창동, 1997)


각본이 어쩌니 촬영이 어쩌니를 따지기 전에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막동이 탄 기차의 열린 문으로 엿보이는 바깥 풍경에 눈길이 갔다는 점을 굳이 말하고 싶다. 빠르게 프레임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막동과 기차 그 어느 쪽에도 어우러지지 못한 채 마치 크로마키 위에 덧대져 있는 그래픽의 질감을 선사한다. 어쩌면 <초록물고기>는 사람보다도 공간의 영화, 아니 정정하겠다. 공간이라고 퉁쳐버리기엔 배경으로 자리매김하는 어떤 영역들의 존재감이 너무나 강하다. 그래서 내게 <초록물고기>는 배경의 영화처럼 다가온다.


기차에서 내린 막동이 3호선 대곡역에서 나오면, 그때부터 배경은 주체가 된다. <초록물고기>는 신도시 개발에 밀려나 버린 한 가정을 조명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막동의 집과 저 멀리 보이는 신축 아파트 단지를 동시에 잡는 숏에선 막동의 공간이 특정성을 잃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일산신도시라는 점이 중요하지, 거기서 밀려난 게 '막동이네 집'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동이 아니라 그 누구의 집이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막동의 집, 그러니까 자신이 살던 원래의 터전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어떻게든 주변부에 매달려 살아가는 집단이 된다. 그리고 막동은 밀려난 사람들을 대표해 스크린으로 소환되는 존재다.


여기서 대표한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긴 해도 성립될 수는 있다. 그 이유는 <초록물고기>가 소설가가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감싸는 손수건은 형상 혹은 이미지 내지는 어떤 상징의 집합체처럼 관념화되면서 막동에게 스며들고 있다. 거울도 자아 정체성을 의식하게 해주는 장치다. 메타포나 복선 등을 심어 놓는 영화의 기본 문법은 당연히 감독의 소설가적 배경이 극에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감독의 시나리오 역시 문학적 감성이 묻어나는데, 그렇지만 <초록물고기>는 소설마냥 해석의 틀에 계속 속박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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