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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Jun 06. 2022

주간 영화

2022.05.28-2022.06.03

<타락천사(墮落天使)> (왕가위, 1995)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 장발 남자의 가족이 한데 모여 하지무에게 아이스크림을 강매당한다. 물론 이 가족은 훗날 '그때 그 트럭에서 아이스크림을 온 가족이 먹었지 뭐야. 정말 어이가 없었어'라며 회포를 풀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하지무는 이를 두고 자신이 이들에게 함께할 수 있는 추억을 선사해 줬다지만, 과연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들 가족의 내면에 가까워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지무처럼 그렇게 단언하거나 혹은 확신할 수 없다. 카메라가 트럭 안에서 이들에게 바짝 붙어 이들의 표정과 행위를 충실히 살피고 있지만, 인물들 그리고 그들을 감싸는 공간은 초광각 렌즈에 왜곡되면서 카메라로 매몰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하지무는 아이스크림 트럭을 매개로 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관객에게 소개하는데, 갑자기 섬뜩한 한 마디를 굳이 사족처럼 덧붙인다. 아버지가 아이스크림 트럭을 싫어하는 이유 말이다.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접속을 차단당한다. 보람찬 얼굴로 트럭을 운전하는 하지무와, 그의 내면을 직접 서술하는 듯한 내레이션 덕분에 그의 심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어쩐지 하지무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무로 인해 <타락천사>는 동력을 얻는다. 가까워질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끝내 가까워질 수는 없는 존재들. 초광각 렌즈가 킬러와 에이전트를 중심으로 피사체들에 열심히 달라붙으려고 하는 게 사실이나, 하지무의 존재가 그러한 카메라의 운용에 활기를 잔뜩 불어넣는 것으로도 모자라 당위를 부여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타락천사>는 황지명과 에이전트로 시작해서 에이전트와 하지무로 끝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황지명과 같이 있는 에이전트로 시작해서, 하지무와 같이 하는 에이전트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 구간을 채우거나 스쳤던 찰리-하지무, 아버지-하지무, 에이전트-하지무, 킬러-베이비, 에이전트-베이비 등의 관계 속에서 알게 모르게 부각되거나 소외되는 다른 존재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함께할 때 포착되는 고독을 (자기도 모르게)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카메라가 사람들을 담는 것인지, 사람 간의 관계를 담는 것인지의 문제다. 사실 인물을 응시하는 것과 관계 자체를 응시하는 것은 확연히 다른 작업이다. <타락천사>는 어느 쪽일까? 인물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파편화된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조각조각 뒤섞인다는 점에서 영화의 지향점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타락천사>는 다시 말해 관계가 성립되거나 해체되거나 유지되는 순간들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 고민에 빠지려는 영화 같다. 이 고민은 무엇에 관한 고민인가.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라는 명제가 아닌,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의 여부 혹은 가능성' 그 자체를 탐색하는 것에 관한 고민이다. 카메라의 시선을 두 사람에게 끝까지 머무르게 하는 대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야만 한다고 인정하는 듯한 마지막 숏에서 어쩌면 난 느꼈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만남도 영원한 이별도 없는 찰나의 그 상태를 희미하게나마 긍정하고 싶어 하는 영화를, 카메라를, 사람들을 말이다.



<애덤 프로젝트(The Adam Project)> (숀 레비, 2022)


시간대를 포개어 놓는 영화들은 그 자체로 이야깃거리를 생성해낸다. <애덤 프로젝트> 역시 흥미로운 지점들이 발견되지만, 이 영화가 타입 슬립을 활용하는 데 있어 선배 영화(및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들의 유산에 크게 기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애덤 프로젝트>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과거의 나와 현시점의 내가 만났을 때 무언가가 교환되어야 하고, 무언가가 치유되거나 변화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결여된 것을 채워주고 때로는 무언가를 내주거나 취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도식화된 서사의 빌드업이 너무나 선명해서 달갑지는 않지만, 숀 레비가 그저 자신의 관심사 혹은 가치관을 투명하게 구체화하는 작업에 몰두해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셀린 시아마의 <쁘띠 마망>처럼 장르의 외피를 깔끔하게 걷어냈다면 훨씬 매력적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애덤 프로젝트>는 세대에 걸친 보수적인 가족 행복론을 담아내려고 하지만, 불필요한 요소들이 고개를 내미는 탓에 그로부터 피어나는 정동이 희미해진다. 어떻게 하면 트렌디하고 스펙터클하게 보일지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SF와 액션이라는 장르의 틀 안에서, 어떻게 변주하고 변형해서 새롭게 보일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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