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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May 31. 2022

주간 영화

2022.05.21-2022.05.27

<더 노비스(The Novice)> (로런 해더웨이, 2021)


'왜?'를 의도적으로 지워내는 <더 노비스>는 시종 야심차다. 그렇지만 동시에 완급조절에 실패한다. 하지만 '왜'를 소거한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모습이 드러난다는 사실만으로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있다. 물론 감독도 이를 의식했는지 주인공의 입을 통해 명분과 당위가 발설되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재밌게도 영화는 관객이 인물의 발언 혹은 동기에 동조하거나 이해할 틈을 주지 않은 채 자신만의 페이스를 다시 되찾으려고 한다. <더 노비스>가 관객과 매끄럽게 만날 수 없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런 고집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러한 영화의 고집은 의도치 않게 형식의 묘미로 이어진다. <더 노비스>에 나오는 가장 눈에 띄는 물품 중 하나는 알렉스 돌의 공책이다. 그리고 영화의 프레임 내부를 유심히 살피다 보면, 어느샌가 감독이 프레임을 돌의 공책으로 여긴 채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진다. 종종 삽입되는 멘트나 지시문들은 마치 돌이 자신의 노트에 휘갈겨 적은 필체를 닮았는데, 그렇다면 이 영화의 직사각 프레임은 하나의 일기장 혹은 내면이 형상화되는 방식이다. 그러면 이 영화는 돌의 내면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관객에게 정보 혹은 심리가 얼마나 공개되는가의 문제, 다시 말해 시점과 인칭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지의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된다. <더 노비스>는 1인칭을 어느 시점까지 유지하고 어디서 3인칭 혹은 전지적으로 뒤집고 있는가, 혹은 그 반대도 좋다. 저만치 떨어져 직부감으로, 마치 신의 시선에서 주인공을 응시하던 영화는, 급작스럽게 인물의 내면 깊숙한 곳을 형상화해 거칠게 흩뿌려 놓기로 마음먹지 않았나. 주변의 피사체를 모두 날린 채 주인공만을 조명 아래 가두기도 하다가 급작스럽게 주인공을 프레임 구석으로 내몰거나 타자화하는 순간들도 종종 느껴진다.


강박과 도전, 한계를 시험하는 인간의 근성. <더 노비스>는 감정의 폭보다는 깊이를 다루고 있지만, 깊이를 다룬다고 심연에 다다를 수 있는 건 아니기에, 영화 자체가 삐걱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카메라가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매개체라면, <더 노비스>는 어쩌면 그 엿보는 방식을 어떻게 가공할지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연구해서 내놓은 고집 센 어느 신예 감독의 야심찬 프로젝트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기시감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말하는 <위플래쉬>와 <블랙스완> 등의 영화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영화는 두 영화의 그늘 혹은 잔상에 머무르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나름 개척하는 시도를 통해 아이덴티티를 획득하려고 든다. 정제되지 않았지만, 날 것의 감성이 느껴지는 <더 노비스>는 서사의 힘보다는 카메라와 연출의 힘을 믿고 싶어 하는 영화 같다.



<무간도(無間道)> (유위강·맥조휘, 2002)


선택과 운명 그 어디쯤에서 부유하는 존재들. 누가 어떤 역할을 떠안은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데 살아남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차라리 이곳에서 해방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무간도>는 가련한 존재들을 끊임없이 지옥에 가두려고 한다. 이 지옥은 오로지 허우적대는 일만이 허용되는 곳이다. 전진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걸 자각하거나 인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무간도>는 두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누구에게도 가까워질 수 없다. 프레임 내부에 들어차는 인물들의 얼굴과 눈빛이 온전히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잠입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 그보다도 영화가 이들을 프레임에 어떻게 가두거나 벗어나게 하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영화의 중반부, 황 국장을 만나러 옥상에 시선을 던지는 카메라는 황 국장 근처에 머무르면서 진영인이 올 때까지 그를 기다린다. 그리고 다음 숏에서 진영인은 걸어오고 있지만, 가까이 오고 있다는 느낌 대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그가 이 지옥에서 어디로든 탈출할 수 없다는 암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가 향할 좌표는 정해지지 않았고, 급작스럽게 황 국장과 진영인을 가까이서 잡는 다음 숏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진영인이 유건명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은 여러 구도로 분열된 채 몇 개의 숏이 이어 붙은 형태로 구성된다. 어쩌면 진영인이 총을 겨눈다는 사실보다도, 총을 겨누는 장면을 다각도에서 응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오로지 카메라뿐이라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부각되는 건 아닌가. 그래서 이곳에 남는 건 두 사람. 관객도 없고, 경찰도 조직원도, 그 누구도 없는 옥상의 두 남자가 영화 속에 갇힌 채 허우적댈 수밖에 없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유건명도 결국 벗어날 수 없고, 진영인도 결국 벗어날 수 없다. 어디에 남든, 이들은 완전히 정박하거나 완전히 떠돌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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