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는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플레 Aug 27. 2023

<오펜하이머>

원자폭탄 모의 테스트에 성공한 이후 무기화를 위해 원자폭탄 사용권을 국가에 넘기고 난 뒤, 오펜하이머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자신의 손으로 초래했다는 사실에 짓눌려 고통받는다. 환호성을 내지르는 대중을 위해 연설해야 하는 순간, 영화는 연설장에 폭탄이 투하된 것마냥 사람들에 미치는 재앙을 시각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하지만 실제 자신이 만든 원자폭탄이 무기로 사용됐을 때,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오펜하이머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모의실험 따위로 확인하거나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신체의 변형 등 영화가 오펜하이머에게 선사하는 재앙의 환영은, 원폭으로 인한 참상을 이미 알고 있는 (놀란을 비롯한) 후대의 인류만이 묘사할 수 있는 영역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가 느끼는 이 같은 내면의 트라우마는 그의 심리에서 촉발됐다기보다는, 오펜하이머를 바라보는 감독의 의중이 그의 심리 자체보다 선행되는 효과를 유도해낸다.


즉, 우리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관객들은 '놀란이 해석하고 싶은'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진짜 오펜하이머의 그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한마디로 <오펜하이머>는 당시 오펜하이머의 내면은 이랬을 거야, 라는 환영을 심어주는 영화다. 환영을 심는 일 자체에 긍정 혹은 부정의 의사 표시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이 환영을 받아들이는 건 관객들의 몫이다. 중요한 건 영화의 속성이다. 다양한 인물의 관점과 사건에 기반한 객관적인 서술과 사실 배치를 내세워 중립을 유지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듯 보여도 실상은 감독이 오펜하이머를 어떤 인물로 조각해 내고 싶은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영화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펜하이머>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인물의 내면을 입체화하려고 든다. 거대한 광풍에 휩쓸릴 운명을 타고난 천재 과학자.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자신의 손으로 만든 무기가 대규모 학살에 이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트라우마가 생길 수밖에 없고, 내면에 큰 타격을 입지 않겠는가.


파악하기 쉽든 어렵든, 여전히 시공간을 오가기를 고집하는 놀란의 스토리텔링은 오펜하이머만의 시공간이 발 딛고 설 무대를 영화에서 소거해버리는 부작용을 낳아버렸다.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들춰보려는 듯한 영화가 과연 그의 내면에 밀착하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기는 한 걸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트로스 제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트로스는 흑백의 프레임 속에서 인물을 재단한다. 트루먼 대통령과의 면담 이후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받아들이고 정치적인 의도로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등의 사후 평가가 스트로스의 입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니까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영화다. 이 과정에서 주변부의 서사들은 한 인물을 둘러싸고 핵분열과 융합의 연쇄 반응처럼 끊임없이 퍼져나가거나 수렴되는 그 진동을 반복한다. 이 진동은 사실 <오펜하이머>가 애초에 인물이 아닌 그 인물을 지탱하는 관계에 의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한계를 고백하는 외침과도 같다. 우리는 역사 속의 오펜하이머에 진정으로 가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존할 수 있는 건 그를 둘러싼 이미지뿐이다.



이미지를 연료 삼아 끊임없이 요동치는 본편에서는 같은 사건이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각각의 시점을 통해 서술되는 구간이 왕왕 등장한다. 두 사람의 시점은 대립쌍이 아니라, 그저 다른 관점으로 사건의 맥락을 읽어내는 각기 다른 창구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는 아주 교묘하게 스트로스를 오펜하이머의 대립항처럼 보이도록 연출해낸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때 스트로스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흑백의 영역이 오펜하이머가 보여줬던 언행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신뢰성을 끌어올리고, 인과 내지는 당위성을 보강할 수 있는 걸까? 오히려 그런 효과는 오펜하이머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회상 과정 속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비공식 청문회에 소환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진술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를 위한 도구로 소비될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의 대립항이 아닌, 오펜하이머에게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언행과 관련된 모든 사건의 서술은 오로지 오펜하이머를 거쳤을 때 그 인과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스트로스는 왜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와 견주는 존재처럼 묘사되면서 극을 이끄는 중책을 맡은 것인가. 격동의 시대 속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기도 하고 또 그 물결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오펜하이머를 향한 놀란의 애정 때문이었을까? 오펜하이머를 정쟁과 흑백논리에서 구출한 뒤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계기를 만들어내려는 놀란의 간절한 바람이 응축된 인물이 스트로스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방식이 본편에서 성공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캐치 미 이프 유 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