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올라누스 스노우의 내면이 뒤틀려 있다는 사실은 이미 <헝거게임> 원작 소설과 그를 토대로 제작된 영화 몇 편을 통해서 노출됐던 정보였다. 이제 관객들은 투명하게 공개된 스노우의 청년기 서사가 어땠는지 되짚어보는 여정에 동참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누군가는 수잔 콜린스가 2020년 내놓은 헝거게임 시리즈의 프리퀄 소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를 통해 스노우의 전사를 일찍이 접할 수 있었다. 또 누군가는 올해 개봉한 이 영화로 스노우의 과거를 처음 목격하게 된다. 서두가 길었다. 이처럼 스노우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글을 시작한 이유는,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이하 <헝거게임>)가 한영 타이틀에 모두 '헝거게임'을 명시했지만 막상 '헝거게임' 자체에는 관심을 꺼둔 채 스노우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극 중 스노우가 처음 관객과 마주하는 신을 떠올려 보자. 어린 소년이 사촌누나와 함께 굶주림에 신음하는 오프닝 신? 아니 정정하겠다. 톰 블라이스의 스노우 말이다. 이 젊은 배우는 몰락한 가문 스노우가의 현주소를 온몸에 아로새기듯, 가냘프고 앙상한 육체에 깃든 굴곡을 드러내면서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광각 렌즈로 뒤틀리게 잡아낸 그의 육체는 공간에 매몰되면서도 기이한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려 입을 셔츠가 마땅히 없고, 냉장고가 늘 비어 있다는 부가 정보를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스노우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청소년기 스노우를 처음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의 몸을 응시하려고 했던 선택이 누구의 의중이었는지는 몰라도, 탁월한 접근이다.
톰 블라이스이자 스노우를 오가는 어떤 존재가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시종 꼿꼿이 세우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체는 그 자체로 효과적인 오브제 내지는 매개체이자 소통의 수단이 된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애쓰는 자의 조바심, 따스하지만 냉혹한 양면성,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법한 숭고한 자존심까지. 그가 내딛는 몇 걸음만 보고 있어도 이런 깊숙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던 탓에, 영화를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보면 <헝거게임>의 운명은 배우들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배우들이 영화를 멱살 잡고 끌고 가기 위한 전제 조건은 하나다. 바로 헝거게임의 스펙터클을 지워내는 것. 헝거게임에 몰두하면, 영화는 길을 잃는다. 이번 <헝거게임>은 사람의 영화지, 헝거게임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헝거게임>은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난투를 최소화한 채 배우들의 매력에 집중하는 영리한 선택지를 보여줬다.
사실 배우 본연의 정체성과 배역의 특성을 시시각각 배합해 공존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사람은 많겠지만, 어째서인지 브래드 피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얼라이드>, <카운슬러>, <바빌론> 등의 영화 속에서 피트는 피트 그 자체일 때도 있지만, 배역에 체화된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아우라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배우에게 의존하는 영화는 배우에게만 머물러도 안 되고, 배역에게만 머물러도 안 된다. 배우와 배역이 공존하고 뒤섞이는 찰나를 잘 포착해 길게 지속시켜야 한다. 하지만 <헝거게임>에서는 긴 러닝 타임 내내 (톰 블라이스를 통해) 완벽한 스노우 구현에 애쓰는 듯한 모습을 노출하는 지점이 종종 보였기에 동력이 떨어지는 구간들도 보였다. 가령 경기 중계를 체크하면서 반칙을 반복하는 스노우의 모습에서는 스노우와 블라이스를 오가는 쾌감보다는 복잡한 내면에 사로잡힌 스노우를 소화하려는 톰 블라이스의 몸부림만이 느껴진 게 유독 아쉽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어쨌든 이번 작품에서 눈에 띄었던 톰 블라이스의 행보를 앞으로도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