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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Nov 28. 2023

<서울의 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궁금하다. <서울의 봄>은 도대체 무엇이고 싶었던 걸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실화 그 자체가 되고 싶었던 건지, 다큐멘터리가 되고 싶었던 건지, 영화가 되고 싶었던 건지 희뿌연 안개만이 눈앞에 서려 있는 기분이 든다. 복잡하게 뒤엉킨 의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물론 창작자가 고민을 어떤 부분에서 했고, 어느 지점에서 타협을 했으며, 왜 이렇게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지 가늠되는 구간들도 제법 보인다. 그러니까 <서울의 봄>은 이도저도 아닌, 절충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없는 영화다. 왜 절충안인지 설명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박정희를 박정희로 내버려두고, 전두환은 전두광으로, 노태우를 노태건으로 각색했지만 태완은 이태신으로, 정병주는 공수혁 등으로 바꿔 조금 더 변화를 줬다는 데에서 출발해보자. 실존 인물을 연상하게 만들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어쩐지 인물의 행적에 따라 미묘하게 조정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선택에 대한 호오를 가리거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전혀 아니다. 역사를 질료 삼아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어떤 사연이 얽혀있듯, 노선이 불분명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다른 선택은 바로, 영화가 시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도입부부터 살펴보자. <서울의 봄>은 1979년이라는 실제 타임라인을 선명하게 띄우면서 오프닝 숏을 내세우고 있다. 이어지는 여러 구간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당시의 시간대를 강조하는 영화의 편집술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테다. 하지만 영화가 시공간을 빌려온 목적은 '재현과 기록'에 방점을 찍는 모양새는 아닌 듯하다. 영화의 화법만 놓고 보면, 그저 현실은 <서울의 봄>에게 질료에 불과하지 않나.


인물들이 시공간에 녹아드는 방식부터 그렇다. 황정민은 황정민대로 늘 그래온 '황정민식 배역 소화'에 열을 올려 전두환을 재해석하고, 나머지 인물들 역시 실존했던 그들에 빙의하는 대신 각자의 스타일을 살리는 데 주력하는 인상을 풍긴다(물론 후대의 우리가 그 이상 뭘 할 수 있겠느냐만). 또 공간적 표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우는 많지 않고, 가시성이 떨어지는 늦은 저녁 내지는 밤 시간대의 지배력이 거의 모든 숏에 짙게 맴돌고 있다. 결국 배경을 분간하기 어려우니 조명의 과잉 혹은 절제에 따라 달라지는 형상에 의지하고, 피사체의 실루엣이나 화면 내부를 유영하는 존재들이 내뿜는 분위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된다. 다시 말해 서울의 구석구석을 굳이 재현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아니 선후관계가 바뀌어도 문제는 없다. 도입한 설정 덕분에 현실과 멀어진 것이든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길 포기한 덕분에 영화만의 시공간이 생겨난 것이든, 어느 쪽이든 말이다. 중요한 건, <서울의 봄>이 12.12 반란 사태와 당대 시공간을 명확하게 포착해서 재현하는 기록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런 선택들이 차곡차곡 쌓여 영화의 선명도를 낮춘다는 데 있다. 반란에 성공하고 군권을 장악한 하나회가 남긴 사진을 실제 찍은 사료로 바꾸는 영화의 결단으로 봤을 때, 분명 <서울의 봄>은 정해둔 목적이 있고 그를 위해 스스로가 선명해지고픈 욕망 역시 들끓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회 주요 인물들을 박제하듯 한 컷 한 컷 스크린에 아로새기는 편집 역시 그 욕망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결코 또렷해질 수 없는 <서울의 봄>은 냅다 내지르거나 신중하게 멈춰서는 양자 택일의 선택지를 포기한 채 어정쩡한 중립 기어 상태에만 머무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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