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는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플레 Sep 28. 2023

<잠>

스포일러 있습니다.



세 개의 장으로 쪼개 놓은 본편의 구성에서 영화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 보자. 관객들은 각 장 사이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시간이 흘러가는 과정 대신, 시간이 흘러갔다는 표지들만 나뒹굴고 있다. 그러니까 <잠>은 사건에 대한 리액션이 전시·나열되는 지점을 주요 거점으로 내세우면서 관객들을 구간마다 멈춰 세운다. 이미 벌어진 과거는 실시간으로 관객들의 지각 체계와 연동될 수 없다. 즉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관객들과 인물의 심리 사이 벌어져 있던 거리를 바짝 밀착시킬 심산이었다면, <잠>은 이런 전개와 서술법을 택하지 않았을 테다. 즉, <잠>은 서사를 온전하게 전달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건, 오로지 인물의 리액션과 관객의 리액션이 어떤 연결고리를 획득할 수 있는지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잠>에서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때 영화는 현수를 바라보는 수진의 시점을 줄곧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잠>은 수진의 눈과 마음에 관객들이 동화되도록 만드는 데엔 다소 소극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의 엔딩 숏은 공간을 지워낸 채 인물만을 스크린에 맺히게 한다. 이 장면만을 놓고 보자면, 인물들이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 명확히 간파하기 힘들다.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곧 중력의 영향력을 최소화한다. 그렇다면 공간의 좌표적 특성이 지워진 프레임에서 부각되는 건, 바로 '시간'일 테다. 과연 엔딩 숏 전후에 어떤 장면들이 들러붙으면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해 내고 있는가. 귀접한 현수의 몸에서 원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광경, 그리고 자정을 향해가는 시계 클로즈업 숏, 마지막으로 긴박하게 스크린을 채우는 수진의 얼굴. 세 가지 대상이 뒤섞이다 보면, 어느새 종착지에 다다른다.


수진의 얼굴을 집어삼킨 붉은빛 조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조명의 발원지를 따져보는 일은 이미 의미가 없다. 이들이 어디에 위치하든 그의 얼굴은 붉은빛으로 둘러싸일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잠>은 인물들이 도달하는 지점에 대한 관심은 드러내고 있지만, 이들이 도달하게 되는 경위 자체는 괄호로 비워둔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감상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로 볼 수 있다. 관객에게 종속됐다는 표현을 바꿔 말하면, 관객이 능동적으로 탐색 지대를 찾아 나설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잠>의 목표는 <곡성>처럼 관객을 교란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마주하는 공포를 내세운 <잠>은 믿음의 영역을 관객이 판단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열려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곡성>이 믿음의 대상을 불분명하게 매만지는 트릭을 선보였던 영화라면, <잠>은 믿음의 대상을 논의의 쟁점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음' 그 자체를 논하는 여타 영화들과 다른 질감을 획득한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느껴진달까. 결국 스크린 속 인물들이 '무엇을 믿을 수 있는지' 따져보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건, 이들이 '왜 믿을 수밖에 없는지, 혹은 어째서 믿지 못할 수밖에 없는지' 가늠해 보는 작업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오펜하이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