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진정해!
이 극렬한 더위 속에서 일거리를 못 만들어서 난리인 요즘의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끝부분에 약한 사람이라는 것. 달리 말하면 초반부에 강한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뒤로 갈수록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한 건 사실.
예를 들면 이렇다.
1. 무엇인가 표현하고 싶어서 블로그에 글을 잔뜩 써 내려갔다가 마지막에 제목을 쓸 타이밍이 되면 (나는 제목을 가장 마지막에 적는다.) 갑자기 발행 버튼을 일분일초라도 빨리 누르고 싶은 기분이 마구마구 들면서 제목을 날림으로 지어버린다.
2. 책을 읽을 때 4분의 3 정도가 되는 지점까지는 문장을 공들여서 신나게 읽다가 갑자기 몇 페이지 안 남은 부분에 이르면 이 책을 오늘 내에 안 끝내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면서 어느새 목표가 책 읽기가 아니라 책 끝내기가 되어버린다. 소설이든 에세이에서든 그 지점쯤 되면 슬슬 마무리를 해나가서 그런 건가? 뭐 대세에 지장은 없지만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러니 의문스럽다.
3. 모든 일에는 큰 줄기와 디테일이라는 게 있는 건데 뼈대는 가열차게 만들어놓고 마지막 디테일을 추가할 즈음이 되면 '아 이쯤 할까' 하고 혼자 타협을 해버린다. 모두가 잘 알듯이 차별점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게임 종료.
4.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웬만하면 다 참다가 어느 날 '이제 못할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들면 그날로 끝이 난다. 끝부분에서까지 내 마음을 일일이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고 싶은 생각이 잘 안 들면서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관계를 끝내 버린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였으면 도대체 저 사람은 왜 끝에만 가면 매번 급발진을 하냐고 욕 엄청 먹었겠지? '저 작가는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한 것 같아요 매번 뿌려놓은 떡밥도 회수를 못하더라고요', '작가가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의 감정선에 너무 불친절한 것 같아요', '후반부로 갈수록 산으로 가서 안타깝네요' 실제로 있는 이런 댓글들 읽다 보면 남일 같지 않아서 가끔씩 움찔한다.
시작이 중요한 만큼 중간 과정도 중요하고, 결말도 중요하다.
큼직큼직한 줄거리와 사소한 디테일은 80대 20이 아니라 50대 5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내용물이 핵심인 것 같지만 마지막에 감싸는 포장지도 한몫을 한다.
그러니까 모든 단계에 좀 더 고루고루 에너지를 분배해줄 것.
밑그림 그리는데 90퍼센트의 에너지를 쓴 다음 몇 개 되지도 않는 물감으로 색칠하려고 들지 말고, 실컷 좋은 선물 준비해놓고 주워온 포장지로 대충 감싸서 가치를 깎아먹지 말 것.
엔딩에서 급발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막판 스퍼트를 낼 줄 아는 사람이 될 것.
뭐가 됐든 여러 도전을 하고 있는 시기이다 보니 나에 대해서 모르고 지나갈 뻔했던 것들을 알아간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다.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침착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