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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Oct 23. 2018

알려지지 않아 다행인 곳, '히타'



어제,

기록적인 폭우로 간사이 공항이 폐쇄되고

오사카 지방에 유례없는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오늘 홋카이도에서는 최악의 지진으로

복구시기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하는데


태풍이 살짝 비켜간 이곳에 내려

모처럼 홀로 됨을 만끽하는 여인들의 머리 위로


히타의 햇빛은 징글징글하게 고왔습니다.



덕분에 예약 없이는 탈 수 없다던

기차도 버스도 텅텅 비어

홀가분함이 배가 되었고요.





여기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최단시간에 당도할 수 있는

작은 시골 온천마을 '히타'입니다.


지난봄 후쿠오카에 다녀갔을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눈 일본인이 추천해준 온천여행지였죠.




일 년 내내 한가한 온천은 이곳밖에 없을 거라며.



길쭉하게 생긴 섬나라 일본에서

어느 지역을 딱히 '내륙'이라 정의하기 어려운 감이 있지만


그나마도 여기서는 내륙으로 꼽히는 곳이라

겨울에 아주 춥고
지금은 아주 더워 사람이 없다는데

펄펄 끓는 서울보다는 무려 3도나 낮았습니다.





오늘은 말로만 듣던 온천 료칸에 처음 묶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료칸이
기차역 픽업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 물어보면 절대 먼저 말 안 꺼내는
새침함이 있기 때문에

예약 전 메일로 미리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운 점.



역 관광안내소 조차 자국의 언어만 고수하고 있어

'호텔 픽업 연락 좀 부탁해요'

라는 한 마디를 전달하는 데에도

번역 앱과 바디랭귀지를 총동원 해야 하는 점...

만 참아준다면.
모든게 다 좋습니다.

그냥 다...



안쪽에 숨어 있다시피 한 작은 곳이지만

참 깨끗하고 단정했습니다.

안 그래도 반질반질 윤이 나는 데도

양복 입은 직원들이 습관처럼
창틀이며 문고리 등을 계속 닦습니다.


이 말차.

한 모금 마시면 입안을 넘어
몸 꽉 차게 스며드는 초록 향.



우리를 위해 정성껏 준비된 저녁밥상과

식사 후 산책을 하고 나니
따땃히 김이 나는 옥외온천.




씻기고 먹이고 치우는 게 일이었던 애엄마들의 삶에

이것만으로도 히타 여행은 100점인 겁니다.



뜨끈한 온천물에 오뎅처럼 몸을 불릴 때는

한동안 말없이 저녁 강 흐르는 바람맞으며

각자의 생각에 잠겨 멍해졌던 그 시간이 너무 달콤해서

아 낭만적이야 그랬어요.

크.... 여자끼리 낭만이라니.

하지만 여자끼리라서
이렇게 간질간질 한 여유도 기분도 낼 수 있었을 터.



목욕을 하고 나니 깔려 있는 이불.

자고 일어나니 또 차려져 있는 아침.


모든 것이 황송해서 이래도 되나 싶은 곳에

멍 때리기 좋을 풍경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커피는 하루 종일 공짜라 비워지기가 무섭게

두 살 어린 막내가 잔을 채워줍니다.



밖에 나가고 싶었겠습니까?

여기가 바로 천국이었습니다.



밤의 색이 어떻게 물들어 흘러 가는지

찬찬히 지켜보다 어느새 곯아 떨어져서




눈뜬 새벽  

자전거를 끌고 나갑니다.



보통 이 시간에는 거리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자거나 아침을 먹는 시간일 테니



새벽 풍경을 담는 순간은

여행 중 가장 공들이는 시간입니다.

오랜 버릇이기도 하구요


엊그제 아시안게임에서

한일전 야구, 축구를 응원하느라
밤새 시끄러웠을 이자카야 앞에서는

괜히 미안하기도 우쭐하기도 했구요



평범한 가정집의 현관문,

담벼락과 창문도 어찌나 이쁘던지





어쩐지 토토로가 튀어나와

넌 왜 새벽부터 돌아다니냐며

너때매 잠도 못 자겠다며 따질 것 같았어요.



새소리 높아지고 공기가 부드러워지니

초등학교 아이들이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가방을 메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마을 가운데로 모입니다.



저의 후진 일본어 발음을 고쳐주던 초등학생과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쳐주던 아이 아빠도.

자전거로 스치는 갈길 바빠 보이는 고등학생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안녕하냐고 물어 옵니다.

요하요우 고자이마스~~



심지어 서툰 한국말로 "안녕하게요?"라고 물어

진짜로 내가 안녕해도 괜찮은지를 되돌아보게도 했었지요.


난달 호이안에서 함께 요리를 배우던 영국 여자가

"당신은 베트남 사람이 왜 영어로 요리수업을 듣나요?"

라고 물어 황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트남 사람과 한국사람의 생김새가

전혀 다르지 않다던 그 처자도 참 신기하지만

니콘 카메라를 목에 걸고 동네 주민처럼 쏘다니는 저를

한국인으로 알아보는 이 사람들도

신기해 죽겠습니다.




주요 관광거리에서 한 블록만 뒤로 가도 멋들어진 길이 이어지고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여 만드는 어묵 간장 두부공장이 여기저기



사랑하는 사케 양조장이 서너 군데.

그냥 지나가면 벌 받습니다. 여긴...





예전 같았으면 저 술통 통째로 이고 갔을 텐데

참 많이 약해졌습니다.


대신 아사히맥주공장에서는 무리해서 세 잔을 연거푸 원샷하고

그 알코올의 기운으로 다녔지요.

100년 숙성된 맥주였고, 아직 시판 전이었으며

지금부터 딱 20분만 공짜라기에...



온 세상이 넉넉해 보이더군요.




갑자기 참 좋은 인생이었어...

라는 생각에

청승스럽기도 했지만

고요하고 따뜻했던 날.

하루 더 있고 싶었으나
카드 청구서 보고 우울해할 남편 걱정에 꾸욱 참은


히타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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