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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Feb 06. 2020

원더랜드뮤지엄: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대전시립미술관 DMA 컬렉션 _ 190330 전시기록

DMA 컬렉션 <원더랜드뮤지엄: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DMA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고 재밌었던 작품을 뽑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작가들의 "매뉴얼" 서류들이 부착돼 있던 벽면을 골랐을 것이다. 


재작년 뉴욕에서 리사(Lisa Park) 작가님을 인터뷰했을 때, 이런 질문을 했었다. 


미디어아트 특성상, 작품의 손상이나 작동 같은 부분에서 신경써야할게 많은데
관리를 어떻게 하시나요? 


그 때 작가님께서는 직접 아주 세세한 매뉴얼을 작성해서 갤러리측에 넘긴다고 하셨는데, 그 매뉴얼들을 작품과 함께 직접 보게 돼서 (이런 건 처음이라서!) 매우 매우 흥미로웠다. 

(보통은 관람객에게 이런 매뉴얼까지는 공개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DMA의 기획 전시 항상 너무 좋다. 좋은 작가들 작품도 잘 컨택해오는 것 같고. TMI지만, [BIO] 전시 때도 Heather Dewey-Hagborg의 <Stranger Visions>란 작품이 있었는데 너무 좋았다.)


러프하면서도 중심이 잘 담긴 스케치와 손글씨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정말 좋았고 말이다. 학부 때 프로젝트 기획하던게 생각나서 두근거렸다.





<광선구> 는 점점 작아지는 39개의 스테인레스 스틸이 일렬로 늘어선 작품인데, 매뉴얼을 보니 실제 지구와 태양의 비례에 따라 거리와 간격을 재현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구마다 지켜야 하는 정확한 간격이 다 나와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엄청나서 새삼 미술관 설치 큐레이션 하는 분들께 존경심이 들었다... 

난 스물 아홉개 쯤 놓다가 성격 다 버렸을거야..


비율에 맞춰 세세하게 배치된 매뉴얼들




황인기 <달빛>


“돈벌려 애쓰는 걸 저만치 놓고, 눈을 반만 뜨고 잠시 바라보면, 달빛이 얹혀진 수풀이 보인다.


곱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다.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요새 부쩍 디디고 사는 땅과 우러르는 하늘에 커다란 災殃(재앙)이 올거라는 걱정이 늘었다. 사람이 잇속에만 눈이 멀어 眞率(진솔)한 理致(이치)를 잃어버린 탓이로다.”



수백개의 리벳이 가득했던 캔버스. 멀리서 바라보니 글귀가 적혀있어서, 새삼 내가 <푸른 벽> 작업 할 때, 담쟁이 심고 글귀 하나하나 바늘로 뚫어서 작업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CNN> 이라는 작품. 

911테러 사건을 표현한 듯, 책상 위에 오브제와 모터로 돌아가는 장난감 비행기가 있고, 그 화면을 교묘하게 cctv로 잡아 뉴스 화면처럼 전시하고 있었다. 깨알같이 자막도 미니어처로 만들어둔게 귀여워서 찍어둠. 폭발 오브제는 처음에 형상때문에 심장인 줄 알았다. 그걸 표현한 것이래도 여러 의미에서 어울리는 듯 해서 난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전준호 <웰컴>


영상 내내 자그마한 헬리콥터는 마치 Hollywood 처럼 언덕 위로 알파벳을 날랐고, WELCOME 이 아니라 WELCOEM 이 됐을 무렵, 돌아오던 헬기 하나는 T를 싣고 가던 마주 오는 헬기에 부딪혀 추락해버리고 만다. 

T는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논밭은 삽시간에 불타오르고.


그렇게 오십원 속 희망찬 환영(Welcome)을 꿈꿨을 어떤 풍경은 Welcome to 어딘가(아마도 코리아였을까)가 되지 못한 채, 미완성인 WELCOEM 으로 끝나고 만다는 이야기. 

(여기서 최근 읽은 안전가옥의 책 <냉면> 속 단편 '혼종의 중화냉면'이 떠올랐다. 영상은 흥미로웠지만 내내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는데, 잘못된 스펠링이 의미하는 건 그런 위화감 속 이도 저도 아닌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그랬던 걸까.)




최우람 <우로보로스>


최우람 작가의 작품은 여기저기 전시에서 자주 봐와서 반가운 마음에 호다닥 달려갔지만, 아쉽게도 작동은 하지 않아서 눈에만 담아두고 와야했다. 비늘이 촤르륵 움직이는 걸 함께 간 아빠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제일 좋았던 작품은, 아빠가 서 있던 그 자리 그 모습.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내내 <우로보로스> 앞에 서 계시던 아빠가 

"우로보로스가 고대신화에 나오는 뱀인데 자신의 꼬리를 자신이 삼키면서 우주를 휘감는 무한을 상징하는 뱀이래. 그걸 표현한건가봐." 하고 알려주셨다. 


아 신화에 나오는 상징적 동물이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이 작품이 아빠에게 따로 의미를 찾아볼 정도로 인상깊었나 싶기도 하고. 함께 전시장을 거닐면서 작품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참 고맙고 좋아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근데 나오다보니 벽에 설명이 그대로 다 적혀있었음. 따로 찾아보신 건 줄 알았더니 ㅋㅋㅋ


그대로 읊어준거면 또 어때, 여전히 내게 많은 걸 알려주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이면 충분한 거니까. 

곁의 사람들에게 좀 더 자주 오래 사랑하는 마음을 안겨줘야겠다고, 매번 생각하면서 못하지만 그래도 뜻밖의 행복한 하루를 보내서 감사했던 오늘. 

아빠가 서계시던 그 자리를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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