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9.
방실이네와 오전 산책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날이다. 오전에 방실이가 오라고 찍어준 주소는 San Elijo Lagoon이란 곳이었다. 트레킹 코스란다. 내가 등산, 트레킹 이런 거에 취미 없는 거 몰랐구나. 그래도 샌디에이고면 뭐든 다 좋지 뭐.
트레킹 코스 초입은 무난했다. 풍경이 좋은 곳마다 멈춰서 사진을 찍어 대니, 방실이가 저기 위에 사진 찍을 곳들이 따로 있다고 했다. 그래, 24장짜리 필름 카메라 감성으로 사진을 좀 아끼자. 조금 더 올라갔더니, 한 명 겨우 통과할 법한 좁은 바위 사이로 아크로바틱 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코스들이 이어졌다. 배 나온 사람들은 여기서 무조건 배 긁히겠군. 재미와 어드벤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코스가 이어져 아이들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했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니 지아가 한 번 더 가자고 졸라서, 도돌이표로 한 바퀴 더 돌았다. 방실이가 갈 곳 많은 샌디에이고에서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군.
두 가족은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자의 일정을 위해 헤어졌다. 방실이가 점심으로 추천해 준 곳은 La Jolla 근처의 taco stand라는 멕시코 음식점이었다. 15년 현지 주민의 추천이면 무조건 가야지.
20분 정도 가는 동안 지영, 지우, 지아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내가 얼마나 부드럽게 운전하는 거야. 셋 다 조금 더 자라고 속도도 늦추고 먼 길로 돌아 taco stand에 도착했는데, 딱 점심시간에 걸려 대기줄이 무지하게 길었다. 그래, 나 혼자 운전 좀 더하자. 샌디에이고 맛집을 검색했다. 1위로 Phil’s BBQ란 곳이 나왔다. 20분 거리, 딱 좋네. 각자 꿈 하나씩 더 꾸면 되겠다.
Phil’s BBQ는 샌디에이고에 몇 개가 있었는데, Sports arena 쪽으로 갔다. 눈을 뜬 지영이는 여기가 La Jolla taco stand인지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다 나처럼 검색하고 오는지, Phil's BBQ 식당 안은 물 반 한국 사람 반이었다. 식당 내부는 제법 hip 했지만 에어컨 바람이 강해 야외 테이블로 자리 잡았다. 고 칼로리와 극강의 콜레스테롤 덩어리 BBQ 폭립을 주문했고, 맛은 그냥 그랬다. 기대치가 높아서였나. 다른 가족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1등 식당 한 번 찍은 걸로 만족하자.
손가락 구석구석 침투한 bbq 소스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다시 누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늘어지기 딱 좋은 타이밍에 은영이 누나의 양초 만들기 클래스가 열렸다. 예전에 취미로 배웠다고 하는데, 양초 케이스부터 고르기 힘들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아이들은 각자 세 개씩 케이스를 고른 후 누나의 지도하에 양초를 만들기 시작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인당 10만 원을 받아야 할 것 같은 퀄리티였다. 이런 걸로 유튜브나 하나 파지. 누나의 하드캐리 덕분에 지영이와 난 평화로운 오후 시간이었다.
저녁은 방실이 집에 초대를 받았다. 뭘 하나 사서 갈까 하다가, trader’s joe에 가서 꽃다발을 샀다. 난 선물 센스가 부족하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훌륭한 선택을 하는 지영이가 골랐으니 이게 최선임이 틀림없다. 역시 방실이는 "뭘 이런 걸 다~"하면서 좋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에 피아노 세 대가 놓여 있었다. 세 대! 이게 미국 클래스인가. 초등학교 때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도 피아노가 세 대였는데, 민간인 집에 세 대라고? 심지어 그중 한 대는 그랜드 피아노였다. 조성진이랑 임동혁이 세 들어 사나? ‘이 상황 설명 좀 해줄래?’란 표정을 지었더니, 원래 두 대였는데 최근 그랜드 피아노를 사서, 기존 두 대는 곧 새 주인을 만나 나갈 거라고 했다.
그랜드 피아노는 연주회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피아노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 집 공간에 맞게 자리 잡는데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이쯤 되면 그랜드 피아노도 하나의 생물이구나. 추억의 을지 악보 피아노 피스들을 정말 오래간만에 봤다. 중고등학교 때 동네 레코드 방에서 나도 참 많이 샀었는데. 우리 집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면, 그 안에 을지 문고 피스 수 백장이 있었는데. 서울로 올 때 다 버렸다. 김건모의 ‘첫인상’,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장국영의 영웅본색 주제곡 “헤이 행손세이 조아 왕모소완뉘~” 참 많이도 치며 불렀는데.
방실이가 나에게 한 번 쳐보라고 했다. 난 당연히 18번 ‘캐논의 변주곡’을 시작했더니, 지아가 ‘에이, 또 이 곡이네’라며 김을 빼놨다. 지아야, 어색할 땐 아무 말 안 해도 된단다. 그리고 이 나이에 한 곡이라도 기억나면 훌륭한 거지. 사회생활 잘하려면, 이럴 때 그냥 첨 듣는 척해주는 거란다.
오래간만에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고 저녁을 먹으며 어른들의 대화를 나누다 보니, 9시가 훌쩍 넘었다. 미국에선 9시 넘게 남의 집에 있으면 실례일 것 같아서, 서둘러 정리하고 나왔다.
은영이 누나집, 실이네 집, 샌디에이고 가정들. 다 너무 평화스럽다. 1년만 와서 살고 싶다. 매일 올리브 오일 마시고 트레킹도 할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