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여인의 첫사랑
Love quitely comes....
Love slowly comes....
Slow as moon swell...
Love is slips into roots....
글로리아.밴더빌트의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이라는 시의 내용이다.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을 보다가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딱히 늙은 여인의 사랑이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사랑의 본질도 사람의 본질처럼 각기 다른 색을 지니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드러나는 행동들이 다를 것이라는 관점, 거기에 맞춰 내 사랑의 본질이 나의 본질일 것이라는 결론, 바닷가 마을 두 늙은 여인네에게 찾아 온 느닷없는 사랑이 일으킨 소란처럼 마음속에서만 시끄럽게 존재하는 이 아우성을 어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에 대한 고민, 이런 것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나의 시간이 실상은 조용히,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 달이 차오르듯이, 뿌리가 내리듯이.
영어 제목으로는 라벤더의 여인들이어야 하는데 왜 연인들이 되었을까? 사랑이야기여서? 남녀주인공이 연인처럼 여겨지는 그 어떤 대목이 굳이 필요 했을 것 같지도 않고 감독의 의도도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라 한국어 제목은 배급사의 유치한 발상인 걸로 판단한다. 가끔 영화배급사들이 한국 관객의 수준을 유딩이나 초딩처럼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영화는 좋았다. 더 없이 좋았다. 늙은 여인의 첫사랑 대상이 젊고 건강한데다 재능이 넘치는 청년인 것도 좋았고, 그 사랑이 억지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만큼의 수줍음과 당황스러움, 머뭇거림이 더 없이 현실적이어서 좋았다. 진짜 있을법한 마음이어서, 진짜 있을 법한 여러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끝이 뻔뻔한 로맨스의 귀결이 아니라서 정말 좋았다.
왜 라벤더일까 찾아보다 꽃말과 전설도 알아내고 어느새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짝사랑하는 이웃나라 왕자(또 등장! 설마 그 왕자의 재탕은 아니겠지?)에게 고백을 하고 답도 듣지 못한 채 전쟁터로 떠나보낸 후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왕자를 그리워하면서 죽었다는 공주, 알고 보니 왕자가 벙어리였다는 슬픈 전설. 그래서 라벤더의 꽃말은 ‘침묵’이란다. 혹은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실제 연애를 할 때 나는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글로 쓰는 일은 많다. 때문에 편지를 쓰거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이 대화의 시간보다 많고 그 때문인지 알콩달콩하고 다정한 이벤트보다는 스스럼없이 공유하는 일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격정적인 멜로 영화를 보면 글쎄? 가 먼저 떠오르고 이번처럼 뜨뜻미지근한 로맨스를 볼 때 오히려 집중하고 공감한다.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해서 보다가 지치기 쉬운 시대극 속 연애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열정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내 열정은 붉은 피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가장 뜨거운 것들은 붉은 색도 아니다. 붉은 색은 뜨겁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을 뿐 정작 뜨거운 것들은 푸른색이거나 하얀색이다. 형태가 눈에 보이게 태운다는 의미의 뜨거움은 붉은 색이 맞다. 따라서 붉은 색은 쇼(보임)의 색이다. 뜨거움이 푸른색이거나 백색일 때 형태는 순식간에 부서지고 사라진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것이 뜨겁지 않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덕질을 시작하면서 적을 두고 있던 이런 저런 그룹의 단톡방을 전부 나왔다. 일상적인 대화를 무리 없이 이끌어가는 것도, 산더미처럼 쌓이는 대화를 스쳐지나가는 것도, 특별한 능력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그 능력이 없었다. 쌓이는 단어들을 무시할 수 없어 일일이 다 읽어내면 읽는 것도 고통이 된다. 지루한 책을 읽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고통이다. 아무리 지루한 책도 기승전결이 있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희망으로 종장을 향해 달릴 힘을 얻는데 비해 톡방의 대화는 끝이 없는 미로 같았다. 기다림 없이 쏟아내는 대화들에 낄 수도, 모르는 척 할 수도, 질책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괴로웠다. 열망이 욕심으로 보이는 바램들이, 소원들이, 희망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곳이라 지켜보는 것도 버겁고 힘들었다. 내게는 지옥이 따로 없어 항복 선언을 하고야 만다. 내 본질이 주로 ‘침묵’과 ‘기다림’에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최근의 덕질이 오버랩 된 것은 감동의 배경으로 쓰인 장치가 음악이기 때문이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안드레아 마르스키’역을 다니엘 브륄이 연기했는데 놀랍게도 폴란드어와 바이올린을 한 달 여 만에 익혔다고 한다.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다. 배우로서는 낯선 얼굴이어서 실제 연주가를 섭외한 줄 알았다. 실제 연주자는 ‘레드바이올린’의 조슈아.벨이었다. 폭풍우 끝에 파도에 떠밀려와 목숨을 구해주고 정성스럽게 보살핀, 낯설지만 잘생긴 얼굴의 청년이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첫 연주 장면에서 느꼈던 소름이 이 영화의 백미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그 장면을 보다가 최애를 그저 최애라서 사랑하다가 팬콘에서 맞은 벼락같은 음악적 충격이 되살아났다. 아, 이거였구나! 그 감정의 정체가! 녹음된 히트곡을 내 방구석에서 듣는 것과 현장에서 목도한 최애의 스타성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었다.
팬콘의 후유증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심각한 건 음원을 들을 때 움직임이 같이 떠오르고 그로 인해 자꾸 눈이 감긴다는 것이다. 영상을 보면 내가 봤던 그 장면과 같은 춤을, 같은 장면을 찾느라 자연스럽게 보면서 즐기질 못한다. 화질이나 음질을 슬퍼할 지경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피상적으로 상상하던 것들이 실체화되고 구체화되면서 벌어지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하면서도 대체 언제까지일까 걱정스럽다. 영화가 끝난 후 우슐라의 이후 상태를 후편으로 찍는다면 지금 내 상태일 것만 같다. 영화는 두 자매가 안드레아의 공연에 초대되어 감동적인 연주회를 관람하고 돌아서는 것이 끝이었지만 내 삶은, 일상은 최애의 팬콘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요즘 외출 전에 하늘을 자주 본다. 간헐적이고 기습적인 비 때문에 우산을 챙겨들고 나서는 습관도 생겼다. 흐림이라는 단어가 주는 모호하고 애매한 느낌을 좋아하는데 소나기 직전, 급작스럽게 어두워지는 하늘을 마주하는 것보다 살짝 구름 낀 흐림을 종일 친구하는 것이 좋다. 구름은 예로부터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문학적 은유로 종종 사용된다. 떼를 이루거나 떼로 몰려다니는 구름을 떼구름이라 하고 ‘안개구름을 타다’라는 표현은 ‘계집을 탐하다’는 뜻이다. 여러 비유 중에도 그 어떤 은유보다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이 있다. 바로 뜬구름이라는 표현이다. 구름이 바람의 손에 이끌려 둥둥 떠다닌다 해서 ‘덧없는 세상사’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떠다니는 구름처럼 순식간에 없어질지 모르는 그 어떤 감정, 사람, 사건, 모든 것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이 사랑은 뜬구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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