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저시력인협회, 제14회 ‘마음으로 보는 세상’ 대상
“ON AIR”
라디오 부스에 '생방송'을 나타내는 빨간 불빛이 들어온다.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ley>라는 곡이 배경음악으로 낮게 깔린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스티브 원더가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딸을 위해 만들었다는 곡이 그렇게 전파를 탄다. 노래에 맞춰 헤드셋에 손을 대고,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대며, 시각장애인 출연자와 “눈으로 그리는 세상”이라고 외친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그렇게 100.7 MHz 마포공동체라디오에서 매주 수요일 라디오 PD 겸 DJ로 시각장애인들이 말하는 세상을 전달했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방송을 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PD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눈에 이상 징후가 생겼다. 늘 왼쪽 눈이 뻐근하고, 시야가 일부 흐릿했는데, 갈수록 눈이 불편해지고 정도가 심해져 안과를 찾게 됐다.
“이러다 실명할 수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검사 기록을 보고 말했다. “젊은 사람이 눈 관리를 왜 이렇게 했냐.”라고 했다. 왼쪽 눈은 1.5, 오른쪽 눈은 2.0인데 실명이라니, 남들보다 높은 시력에 눈은 늘 내 자랑거리 중의 하나였는데,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덜컥 겁이 났다. 많이 놀란 티가 났을까.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관리를 하면 나아질 수 있어요.”라고 다독였다.
병명은 ‘황반변성’ 망막 중심부에 위치한 황반부에 변화가 생기면 나타나는 이 질환은 그렇게 낯설게 찾아왔다. 의사 선생님은 “비문증도 있다”라고 덧붙이며, 정도가 심한 편이라고 했다. ‘황반변성은 뭐고 비문증은 또 뭘까.’ 집에 오는 길에 곰곰이 따져봤다. 1,000억을 줘도 바꾸지 않을 내 눈이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봤다.
그러다 알게 됐다.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시절, 매 학기 1등 성적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논문과 보고서를 파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맞다. 그때부터였다. 책을 볼 때,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 시선이 향하고 머무는 곳에 작은 파리 한 마리가 갑자기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날파리증’이라고 불리는 ‘비문증’의 시작은 바로 그때였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비문증’이 시작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반듯한 선(線)이 일그러져 보이기 시작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사람과 사물의 일부가 갑자기 흐릿하게 보이고, 삐뚤어져 보였다. ‘그때 안과를 찾을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몸 어딘가 아프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평소 꿈꾸던 라디오 PD가 됐는데, 평소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좌절감으로 금세 우울해졌다. 그러다 문득 마냥 이러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과에서 나눠준 눈 관리법을 펼쳐, 읽고 또 읽었다. 눈의 노화를 막아 준다는 루테인이 무엇인지 도베실산칼슘수화물의 특징과 효능이 무엇인지, 처방전에 적힌 약들을 일일이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대학병원 안과를 드나들 때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같은 증상으로 많이 와요.”라고 “사람들이 눈 관리법을 잘 아야 하는데…….”라고 말을 흐렸다. 전문의 선생님은 “사전에 예방할 수 있고, 관리하면 나아질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망막이 손상되고 시력장애가 와서 좌절하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상실감을 딛게 했다.
그래서 시작했다. 안과 전문의의 친절한 설명에 용기가 났다. 고민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의사 선생님의 당부와 격려는, 그렇게 내가 현재 하는 일로 이어졌다. 그동안 시각장애와 눈 질환에 관한 공부와 학습은 라디오 방송국 기획안으로 꾸려졌다. 나처럼 사람들이 뒤늦게 후회하지 말게 하자는 각오로 기획안을 한 줄 한 줄 채웠다. 내 다짐은 사람들과 함께 질환을 극복하자는 의지로 이어져, 사람을 섭외하고, 시각장애 관련 사연을 찾게 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매주 시각장애인을 스튜디오로 모셨다. 시각장애 1급인 출연자는 손가락 끝으로 점자 대본을 읽으며 멘트를 시작했다. 라디오 대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마이크 앞에서 어떻게 발성을 해야 하는지를 사전에 교육했었는데, 시각장애인 출연자는 미리 점자 대본을 준비해오셨다. 한 번의 방송이 두 번의 방송으로 그렇게 방송이 반복되면서 알게 됐다. 점자로 읽으면서 말하는 것이 비장애인이 글을 읽고 말하는 것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때때로 안과 전문의를 방송국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현재 시각장애를 겪고 있는 내 상태를 청취자에게 알리고, 안과 전문의의 입을 빌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시각장애 현상을 다뤘다. 황반변성, 녹내장 등을 설명하며, 사전에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눈에 이상 증상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증상 이후 어떻게 눈을 관리하고 치료해야 하는지 청취자에게 전달했다. 볼륨을 높이고 전파를 타게 했다.
“포기했어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시각장애인은 “TV와 영화를 보는 것을 포기했다”라고 말하며 구체적인 사연에 관해 이야기했다. 정부에서 시각장애인의 방송접근권을 위해 TV 수신기를 무료로 보급하고, 화면 해설방송을 정책으로 실시하고 있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 실태도 언급했다. 그렇게 알게 됐다. 시각장애인이 TV 보는 걸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을, TV 대신 라디오를 찾는 상황을 파악하게 됐다.
그런데 TV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시각장애인이 영화를 보기도 쉽지 않았다. “1,000만 관객 돌파”, “할리우드 대작”이라고 세상에서 시끌벅적하게 말하지만, 정작 영화관에서 시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영화와 선택할 수 있는 시간대는 제한적이었다. 비장애인이 겪기 힘든 일들이 시각장애인에게 흔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1,000만’이라는 숫자에 시각장애인의 비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시각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영화관 장애인석에 정작 장애인이 앉아 있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포기하지 마세요.”
시각장애인 분의 사연을 듣고, 라디오 DJ 석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함께 하자”고 했다. 현재 시각장애를 겪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을 넘어, 이 방송을 듣고 있을 눈 질환자와 시각장애인에게 의지를 다지고자 했다. 그 진심이 통했을까. 실시간 댓글과 문자로 사람들의 응원이 쏟아졌다. 비문증, 황반변성에 대한 궁금증은 백내장, 녹내장 등의 질문으로 이어졌고 시각장애인에 대한 격려가 쏟아졌다. ‘아,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청취자의 뜨거운 반응에 생각은 확신이 됐다. “하루라도 빨리 정부에서 시각장애인 문제 해결해야 한다.”는 생방송 도중 걸려온 한 아주머니의 격려 전화에 시각장애인 출연자가 울고, 그렇게 나도 울었다.
“4월 20일”
매주 시각장애인과 방송을 하며, 알게 된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인지 방송을 하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빼빼로 데이, 로즈 데이, 크리스마스 등 흔한 기념일을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 주변의 이웃인 장애인을 위한 날이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몰랐었다. “장애인의 날이 언제지 알아요?”라는 시각장애인 출연자의 질문에 우물쭈물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을 한다면서, 너무나 무지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했다. 부끄러워하지만 말고,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방송을 꾸몄다. 대본과 음악 구성을 넘어, 실제로 라디오 방송 제작환경을 시각장애인이 겪고 있을 상황을 가정해 어둡게 했다. 방송에 꼭 필요한 불빛을 제외하고, 모든 빛을 최소화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안대를 직접 착용하며,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시력이 무뎌져 가는 상황을 경험하며, 시각장애인 출연자와 함께 ‘어둠’에 대해 이야기했다. 딱 하루만이라도 시각장애인의 고충을 느껴보고자 했다.
“왜 안 돼요?”
시각장애인과 함께했던 지난 나날들. 약시가 무엇인지, 준맹과 전맹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구분하게 됐다. 단순히 지식만 쌓은 게 아니라, 시각장애인 고용 실태와 문제를, “보조견을 동반한 장애인의 출입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할 수 없다”는 장애인복지법 40조의 내용과 이를 무색하게 하는 우리 사회 차별을 알게 됐다. 라디오 방송에서 “시각장애인은 안 된다”는 우리 사회 민낯을 드러내며, 시각장애인이 왜 안 된다는 것인지를 따졌다.
“다시, ON AIR”
누군가 그랬다.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라고 했다. 시각장애인 문제를 매주 한 시간, 그렇게 1년 6개월을 함께 했다. 방송하면 할수록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처음부터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라는 이들의 사연을 들을 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촉촉해지기도 했다. 라디오 방송이 끝나고 시각장애인 출연자의 손을 잡고, 세상을 함께 걸었던 시간들. 시각장애인과 울고 웃으며 함께 했던 그때 그 순간과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라디오 방송의 힘이었을까. 시각장애인과 함께 한 덕분이었을까. 시각장애인과 방송을 함께 하며 좋지 않다던 내 눈의 상태는 현재 처음보다 많이 호전됐다. 정기적인 안과 검진과 처방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앞으로도 해 볼 예정이다. 내 눈이 나아진 것처럼 시각장애인 문제가 개선될 수 있도록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다. 시각장애인의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다시, ‘ON AIR’의 불빛을 밝히며, 비장애인이 아닌 시각장애인의 눈으로 세상을 그려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