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brý den, Praha - 체코의 모든 것.
책은 정말 신기합니다. 책은 책을 소개해주고, 그렇게 소개해주었던 책들이 '체코'라는 한 국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으며, 카피라이터 박웅현의 책을 읽으며, 소설가 김영하의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체코라는 나라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체코를 이야기했을까요? 아닙니다. 단지 체코의 소설가를 한 명 소개해주었을 뿐이지요. 그렇게 저는 책에서 책으로, 책에서 작가로, 작가에서 체코라는 나라로, 그렇게 체코라는 나라를 더 깊이 알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체코는 문학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문학은 체코인의 문화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체코 사람들은 책을 정말 가까이합니다. 트램, 지하철 그리고 공원 벤치나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 읽는 사람을 보기 힘든 우리나라와는 사뭇 비교가 됩니다.) 체코인들의 넘치는 문학 사랑만큼이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들이 많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연신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가들을 소개해드리죠. '착한 병사 슈 베이크의 모험'을 쓴 반전 문학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 '변신' '성' 등을 집필한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프란츠 카프카,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쓰며 사회적 병폐를 통렬히 비판한 카렐 차페크,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반체제 작가이자 체코공화국 초대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등 너무도 유명한 문학가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현대 소설가로 꼽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 밀란 쿤데라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뇌. 섹. 남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뇌가 섹시한 남자'를 줄여 이르는 신조어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남자'를 가리킵니다. 말만 들어도 빈틈없이 완벽해 보이는 이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중에 한 명이 밀란 쿤데라이지 않나 싶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책들을 읽다 보면 그의 뇌가 얼마나 섹시한지 곧 알게 됩니다.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57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쓴 모든 저서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 두 문장으로 깔끔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작가, 쿤데라는 굉장히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하길 꺼리는 작가입니다. 그래서 그를 그의 작품으로 만나볼 수밖에 없죠.
쿤데라는 1929년 4월 1일,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도시 브르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체코가 자랑하는 음악가 레오의 야나체크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술적 분위기가 가득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아버지는 밀란 쿤데라를 음악가로 키우고자 유명 작곡가에게서 작곡을 배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음악을 자양분 삼아 현대 예술 전반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비록 음악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음악적 성향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며, 후에 그가 집필한 소설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밀란 쿤데라는 야나체크의 음악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더 나아가 야나체크의 음악을 자신의 '미학적 유전자'로 여깁니다.
“무엇을 통해 내 고국이 내 미학적 유전자에 각인되었는지를 나한테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야나체크의 음악을 통해서라고.” 밀란 쿤데라 <만남>
비범한 천재였던 쿤데라에게 브르노는 작았습니다. 그래서 문화예술의 중심도시 프라하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 프라하는 공산주의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공산당이 내건 달콤한 이상주의적 구호는 밀란 쿤데라를 흔들게 됩니다. 아마 나치 독일 치하의 악몽이 너무나도 가깝고 생생했으며, 열아홉 어린 나이의 열혈 청년이었던 쿤데라는 이런 분위기에 쉽게 휩쓸렸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시 새로운 세대의 화가, 조각가, 음악가 등이 각기 자신들의 언어로 공산주의를 찬미했습니다. 이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합니다. 과거 체코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대표 사회주의 리얼리즘 조각이 있었습니다. 현재 얀 후스 광장(Staroměstskénáměstí)에서 Pařížská 방향을 바라보면 레트나 공원(Letenský profil)의 거대한 메트로놈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그곳에는 체코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스탈린에게 아부하기 위한 스탈린 기념 동상이 위치해있었죠. 스탈린에 의헤 체코인들이 공산주의로 인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거대한 메트로놈만이 좌우로 움직이며, 반복되는 역사의 과오를 뒤풀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프라하 시민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체코의 예술가들은 시, 소설, 영화, 조각, 건축 등 예술 전반에 걸쳐서 체제가 필요로 하는, 공산주의를 찬미하는 작품을 써야 했습니다. 쿤데라는 카를 대학의 신입생이자 신입 공산당원이었고 쿤데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음악이론, 영화, 문학, 미학 등을 두루 공부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선택한 분야가 시(詩)였습니다. 쿤데라는 까를대학을 졸업하고 프라하 국립 예술대학 영화학부(FAMU) 조교에서 FAMU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뿐만 아니라, 평론과 희곡까지 경험한 쿤데라는 소설에 도전합니다. 그렇게 그의 명성을 드높인 첫 장편소설 <농담>이 완성됩니다. 공산주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위험성을 차차 알아채게 되던 그는, <농담>이라는 소설 속에서 공산주의의 만행을 고발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적 개혁 운동의 지도자로서도 활동하게 되죠.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밀란 쿤데라 <농담>
밀란 쿤데라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과 함께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습니다.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추진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만, 개혁적 낙관주의의 짧은 봄날이 소비에트 침공으로 무참히 막을 내립니다. 결국 프라하의 봄은 오지 않았으며 밀란 쿤데타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산정권은 쿤데라의 FAMU 교수직을 박탈하고, 그의 저서를 압수하고 출간을 금지시켰습니다.
자신의 국가에서 작품 활동이 불가능해진 그에게 한 국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바로 프랑스입니다. 1975년 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저항하고 있는 체코 시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웃음과 망각의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망명한 1984년,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잘 알려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출간됩니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배경 안에서 네 주인공 토마시와 테레사, 사바나, 프란츠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표면적인 사랑이야기 같지만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우연과 운명, 삶과 죽음, 개인과 정치 혹은 역사와의 관계까지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와 밀란 쿤테라만의 통찰력을 볼 수 있는 역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화가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1968년까지 나는 체코 국내의 소설가였을 뿐 아무것도 외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 뒤에 작품들이 더러 번역이 되긴 했습니다만 체코 안에서 작가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프랑스를 작가로서의 조국으로 선택한 겁니다. 내 책들이 먼저 나온 곳은 파리였고 나로서는 그 상징적 의미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 Lois Oppenheim, Clarifications, Elucidations: An interview with Milan Kundera", The Review of Contemporary Fiction, 1989-
많은 예술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파리는 쿤데라에게 특별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도시였으며, 그의 소설책이 처음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도시였죠. 지금 프랑스인들은 쿤데라를 체코 출신의 프랑스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들은 대부분 프라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한 후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내린 보헤미아 땅을 밟지 않으며, 86세의 나이에도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2000년 <향수> 이후 14년 만의 <무의미의 축제>를 출간했습니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역 최고령 소설가 밀란 쿤데라.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섹시한 뇌는 어디 가지 않나 봅니다. 밀란 쿤데라는 그동안 탁월한 문학적 깊이를 인정받으며 체코 작가상, 메디치 상, 클리멘트 루케 상, 유러피안 문학 상, 예루살렘 상, 커먼웰스 상, LA타임스 소설상 등을 많은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하지만 꾸준하게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는 있으나 아직 수상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밀란 쿤데라 소설의 팬으로서 '이렇게 뛰어난 작가에게 왜 아직 노벨문학상이 주어지지 않았을까?'하는 의문마저 드는 최고의 작가입니다. 혹시나 체코를 여행하려고 계획을 세우거나, 여행 후에 조금 더 깊이 체코를 알고자 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밀란 쿤데라의 책 한번 읽어보시는 것은 어떠한가요?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