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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대호 May 26. 2016

체코 화가 알폰스 무하 (Alfons mucha)-2

Dobrý den, Praha - 체코의 모든 것.

01. 무하의 최종 목표


화가는 고독하며 배고픈 직업입니다. 알폰스 무하와 동시대의 인물들을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무하와 친분이 두터웠던 폴 고갱은 가난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에서 고독한 생애를 마칩니다. <별 헤는 밤>, <해바라기>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 역시 가난과 정신질환에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키스>로 유명한 아르누보 대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도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외설적이고 파격적인 그림으로 오늘날과 같은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뇌졸중으로 눈을 감았았습니다. 한때 자신의 캔버스를 땔감 삼아 추위를 녹여야 했던 큐비즘의 대표 화가 파블로 피카소 역시도 가난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을 당시보다 현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폰스 무하는 달랐습니다. 그는 다른 화가들과는 다르게 사회적인 명성도 얻었으며 경제적인 부도 쌓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도 있었지요.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이제 고국으로 향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오랜 지배에 신음하고 있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슬라브 서사시>를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만약에 그의 최종 목표가 단지 부와 명성을 쌓는 것이었다면 파리에서의 생활에 만족했을 겁니다. 더 이상 나무랄 것 없는 완벽한 상황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반복되고 무료했던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말입니다.


'The artist must remain faithful to himself and to his national roots.'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조국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 알폰스 무하 -




02. 인생 후반기 작업을 위한 든든한 지원군


무하의 아내 Marie Chitilová (1882-1959)

자신의 결심을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 '마르슈카'의 역할도 컸습니다. 그녀는 무하에게 안정을 찾아주었죠. 21살이었던 그녀는 미술학도로서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고국 출신인 무하의 성공을 지켜보았던 그녀는 예술가로서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같은 민족이었기에 무하도 스스럼없이 그녀와 교류하게 됩니다. 먼저 사랑의 감정을 느낀 건 44세의 무하였습니다.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던 그는 '마르슈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결국 1906년 6월 마르슈카와 프라하에서 결혼에 골인, 후에 가족은 알폰스 무하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1919년 무하가 디자인한 체코슬로바키아 지폐. 지폐 속 인물은 자신의 딸 '야로슬라바'이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순조로웠습니다. 그에게 교육받았던 제자이거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대거 활동하고 있었기에 그의 명성은 이미 미국에 퍼져있었습니다. 시카고에 자리 잡은 그는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잡지의 표지를 의뢰받고 작품을 파는 등 미술가로서의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부족함 없는 일상이 반복되던 그때, 드디어 자신의 꿈을 실행시켜줄 엄청난 지원군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벌이는 성공한 백만장자 찰스 리처드 크레인입니다. 무하는 자신의 꿈인 <슬라브 서사시>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했고 자금 지원을 약속받게 됩니다. 어떻게 그는 타국이었던 체코의 민족에 대한 그림에 투자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명망 있는 사업가로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체코-슬로바키아 1대 대통령 토마쉬 가릭 마사리크였습니다.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슬라브 민족의 관심과 이해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시 무하는 운이 따르는 천재입니다)




03. 본격적인 민족주의적 행보


1910년, 지원에 힘입어 <슬라브 서사시>의 작업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무하는 단지 <슬라브 서사시>만을 제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먼저 프라하 시민회관(Obecní Dům)과 내부의 시장 홀(Lord Mayor's Hall) 작업을 시작합니다.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이곳에 체코 역사 속 훌륭한 인물들을 그려 넣습니다.

아르누보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프라하 시민회관(Obecní Dům).
프라하 시민회관(Obecní Dům)의 내부 시장홀

'Lottery of the Union of Southwestern Moravia' (1912)

무하는 민족을 위한 포스터도 제작합니다. <브르노 남서 모라비아를 위한 국민연합 복권>이라는 작품입니다. 단지 복권을 광고하기 위한 포스터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심오합니다. 무슨 내용을 담은 포스터일까요? LOTERIE, '복권'이라는 글 아래에 절망에 빠진 한 여성의 모습과 펜과 공책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여자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는 목상(슬라브 고대 신, 스반토비토)을 감싸며 생각합니다. " 정녕 신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펜과 공책을 든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공부하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과 언어를 지키기 위해 자금지원을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지배를 받을 당시 학교에서는 독일어 교육이 이루어졌고, 체코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학교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민족성(언어)을 지키기 위한 교육을 위해 사설학교 설립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복권을 발행했던 것입니다.


이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고 강요하여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 강점기 때의 우리나라. 그만큼 슬라브 민족과 한민족은 굉장히 많이 닮아있습니다. 자신만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 주변 강대국에 의해 민족성을 잃을 뻔한 것 등 약소국가로서의 동질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포스터가 재밌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앞의 여자 아이를 주목하면 일본 애니메이션과 굉장히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 포스터는 많은 유사점을 보입니다. 몸은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틀었고 들고 있는 펜과 공책은 칼과 탈로 그리고 시선은 정확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슬라브 서사시>를 작업하는 무하
Klementinum Hall에 전시된 <슬라브 서사시>  11점.

찰스 크레인의 지원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한 무하로서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도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를 하나하나 완성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련도 있었죠.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무하의 작품 제작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전과 같은 크기의 대형 캔버스를 구하기 어려웠졌습니다. 그래서 이때 완성된 작품들은 저마다 크기가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시련의 끝은 조국의 독립이었습니다. 조국 독립의 기쁨과 함께 무하의 작업도 탄력이 붙습니다. 1919년 <슬라브 서사시> 가운데 11점을 프라하의 클레멘티놈(Klementinum) 홀에 전시하였고, 전시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그해 겨울 미국에서도 전시하게 됩니다. 남은 작품도 순조롭게 진행되며, 1923년 드디어 슬라브 서사시 20 연작 완성을 완성하게 됩니다. 꿈꾸던 인생의 후반기 목표를 이루게 된 것이지요.


'The Slav Epic' No.1 - 슬라브 민족의 원고향 (1912)
 'The Slav Epic' No.2  - 뤼겐 섬의 스반토비트 축제 (1912)
'The Slav Epic' No.3 - 슬라브어 전례식 문서의 도입 (1912)
'The Slav Epic' No.8 -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하는 얀 후스(1916)
'The Slav Epic' No.20 - 슬라브 찬가 (1926)

<슬라브 서사시>는 현재 프라하 7구역에 위치한 Veletržní palác에 2016년 12월 31일까지 전시되고 있습니다. 올해에 체코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남는 일정에 방문하여 무하의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슬라브 서사시가 전시되어 있는 Veletržní palác. (주소:Dukelských Hrdinů 530/47, 170 00 Praha 7)

'Woman in the Wilderness' (1923)
'Woman in the Wilderness'의 모델이 되어 준 아내 마르슈카

1923년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한 해에 '광야의 여인'이라는 작품도 작업합니다. 이 작품은 1921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대기근으로 끔찍한 고통을 받는 러시아 농부를 주제로 그렸습니다. 그림을 보면 언덕 위에서 그녀를 노리는 세 마리 늑대피할 수 없는 운명을 두려운 기색 없이 받아들이는 여성 그리고 그녀를 밝게 비추는 별빛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 마리의 늑대는 체코를 호시탐탐 노리는 주변국(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을, 러시아 여성은 같은 슬라브 민족인 체코인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밝게 비추는 별빛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31년 무하는 프라하성 내에 자리한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에도 참여합니다. 이 성당은 926년경 작은 원형의 로툰다 교회 건물이었던 것을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새로 지어졌습니다. 1344년 까를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지만 잦은 전쟁과 화재로 완성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많은 경제적인 후원을 받으며 건축에 들어갑니다. 그때 체코의 슬라비아계 은행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무하가 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어 냈습니다.


조국을 위해 몸 바쳐 헌신하고 자신의 꿈을 이룬 무하의 나이가 7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때 체코는 또 한번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히틀러의 등장 이후 독일은 나치당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고, 뮌헨협정으로 체코-슬라바 키아 영토인 주데렌란트까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져가게 됩니다. 서서히 독일 나치에 잠식당하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모든 주권마저 빼앗기게 되죠. 그렇게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킨 독일 나치는 노령과 폐렴으로 고생하고 있던 무하를 체포합니다. 그의 체코에서의 영향력과 위치가 두려웠던 것이죠. 풀려난 후 나치의 고문을 이기지 못한 무하는 80세의 생일을 열흘 앞두고 눈을 감게 됩니다. 그리고 체코를 빛낸 인물들이 묻혀있는 비셰흐라트 묘지에 안장됩니다.






04. 느낌표


알폰스 무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화가입니다. 단순하게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체코 출신의 화가였다면 체코인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지는 못할 겁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그이기에, 체코인들에게는 화가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화가입니다.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일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 국가였던 체코는 민족주의적 색채의 무하를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체코와 수교를 맺은지 얼마 되지 않은 이유도 았습니다. 1989년에서야 민주화를 이룩한 체코와 1993년 정식 수교를 맺었기에 알려지기 힘들었죠.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근대화했던 일본은 무하를 일찍 접했습니다. 심지어 도쿄에 무하 미술관을 가지고 있고 100점이 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무하를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먼저 접했던 것입니다.


알폰스 무하의 숨결은 100년 전 그때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가구, 장신구, 포스터, 도자기, 달력, 책 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해 나갔고 큰 명성과 부를 얻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아르누보 디자인을 머금은 상품들과 광고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생활 속 깊이 파고들어와 있죠. 체코에 관심이 있거나, 여행을 계획하고 있거나 혹은 막연하게, 어떤 동기로든 이 글을 접했다면 알폰스 무하에 대한 생각이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Mucha Museum 내에 기념품shop. ⓒhttp://www.prague-information.eu/

 심심한 Tip. 체코 프라하를 거닐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폰스 무하의 그림들로 만들어진 기념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체코를 여행하시면서 특별한 기념품을 찾으시는 분들은 알폰스 무하 스타일로 디자인된 스카프, 달력, 포스터, 펜던트 등을 사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하 박물관 내의 기념품샵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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