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brý den, Praha - 체코의 모든 것
온몸으로 프라하를 만끽하고 싶다면 언제가 제격일까요? 바로 5월의 봄입니다. 유럽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최적의 날씨와 더해지는 한 가지.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축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매년 5월 12일에 시작하는데, 이 날은 1848년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가 예순의 나이로 숨을 거둔 날입니다. 그를 추모하며 시작한 축제라고 할 수 있죠. 개막 공연에서는 그의 걸작으로 손꼽히며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작 <나의 조국> 연주되며 그 서막을 알립니다.
스메타나는 우리에게 굉장히 생소한 작곡가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클래식 자체가 생소했습니다. 클래식은 자장가 정도로 생각하던 문외한이었죠. 그런 무식함을 깨웠던 저의 클래식 첫 경험이 바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블타바'란 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여덟 단어'라는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다 멈추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미했습니다. 그가 소개해준 그대로 음악은 제 가슴에 박혔습니다. 음악에 귀를 맡기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블타바 강을 느꼈습니다.
저의 경우 클래식 음악을 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대학 때였습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맥주나 한잔 하자고 놀러 갔는데 커다란 오디오가 있었어요. 친구가 LP를 하나 걸어줬습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음악을 듣는데 갑자기 강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청각이 시각화되어서 강물이 보이고, 그 강물이 흘러가고 그러다 물줄기가 점점 거세졌습니다. 친구에게 곡명을 물어보니까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몰다우'라는 곡이었습니다. 몰다우 강을 묘사한 곡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음으로 묘사한 것이 나에게 그대로 시각화되어 전달된다는 사실에 전율했죠.
박웅현 '여덟 단어' p.86
블타바 강은 프라하를 여행하면 반드시 가야 하는 곳입니다. 낮에는 여유와 낭만을 선사하고 밤에는 고즈넉한 야경을 배경으로 사랑을 속삭이게 만드는 카를교가 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이 카를교 위에 줄지어 세워져 있는 30개의 석상을 보며 굽이쳐 흘러가는 블타바 강을 내려다봅니다. 다리 위에는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합니다. 프라하를 찾은 연인들은 여행객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난간에 기대어 포옹과 키스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이 곳에는 스메타나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카를교에서 구시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스메타나의 이름을 딴 길이 강과 평행선을 이루며 이어집니다. 국립극장에서 까를교 입구까지 이어지는 이 길을 smetanovo nábřeží(스메타노보 나브로제지)라고 합니다. 스메타나는 60년의 인생 중 28년이라는 세월을 프라하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생애의 절반을 프라하에서 숨쉬었던 것이지요. 그중에서도 이 곳, 국립 극장과 블타바 강은 그의 음악 인생에서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1824년 3월 2일, 베드르지히 스메타나는 보헤미아의 리토 미실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정적인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였던 맥주 양조업자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일찍부터 쉽게 문화생활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메타나는 열다섯 살에 프라하 아카데미인 '김나지움'에 다니면서 프라하의 문화에 매료됩니다. 특히 음악에 푹 빠져버리게 되고 학교 공부에는 소홀하게 되죠.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갈등이 생기지만, 음악가로서의 꿈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신의 은총과 신의 도움으로 나는 언젠가 기술에서는 리스트가, 작곡에서는 모차르트가 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음악에만 전념해 뛰어난 음악가가 되겠다는 각오는 현실에 벽에 부딪힙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으로 곤궁해졌고,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2월 혁명의 여파로 프라하에도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6월 혁명운동이 일어납니다. 나라 전체가 뒤숭숭해지죠.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그 결과로 오스트리아의 더 강한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 체코어 대신 독일어를 써야 했고, 음악에 있어서도 체코어 오페라와 연극이 강력하게 통제됩니다. 스메타나는 스웨덴을 탈출구로 삼습니다.
조국을 떠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죠. 스메타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회 현실에 무관심한 삶을 살았던 그는 민족의식에 눈떴을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으로서의 작곡가의 역할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스메타나는 의도적으로 체코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유년시절부터 배워온 독일어를 버리고 체코어로 쓰기 시작한 것이지요. 민족의식에 대한 자각은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스메타나는 1861년 5월 프라하로 돌아옵니다. 오랜 준비 끝에 음악학교를 열고, 오페라 데뷔작인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인들>에 이어 <팔려간 신부>를 발표합니다. 그의 오페라들은 성공했고 체코 음악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1860년대 들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식민 정책이 유화적으로 바뀝니다. 그때 체코에서는 민족운동이 크게 성장합니다. 민족문화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체코 사람들은 독일어가 아닌 체코어로 된 오페라와 연극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체코어 전용극장 건립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고 국민들의 성금이 모아졌죠. 그리고 1881년 6월, 드디어 체코인의 손에 의해 체코어 전용극장을 건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립극장 개관에 맞춰 스메타나가 작곡한 보헤미안의 건국 신화를 소재로 한 <리 부세>가 당선되어 초연됩니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만에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죠. 국립극장이 원인 모를 화염에 휩싸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 6주 만에 성금이 다시 모금되고 재개관하게 됩니다. 이는 체코인들의 민족의식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도 역시 스메타나의 <리 부세>가 초연되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개관기념 오페라는 모두 <리 부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리 부세는 체코 건국신화에 나오는 공주입니다. 그녀는 프레미슬리드 왕조를 세운 인물로, 부친의 뒤를 이어서 슬라브족 최초의 여성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400년간 프레미슬리드 왕조는 계속되었습니다. 당대의 작곡가 스메타나는 보헤미아인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작품으로 프레미슬리드 건국신화의 리부세 공주를 택한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을 음악을 통하여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체코의 국민음악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잔인했습니다. 수년간의 구애 끝에 결혼했던 아내 카테리나 콜라르로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네 명의 딸 중 셋이 어려서 죽습니다. ‘피아노 3중주 g단조’는 큰 딸 베드리지슈카의 죽음을 슬퍼하며 작곡한 음악이지요. 그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1859년에 폐병으로 사망합니다. 스메타나는 콜라로바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16세 연하의 베티나 페르디난도바와 결혼하지만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됩니다. 매독 균이 혈관을 타고 뇌까지 침범하며 정신착란 증세가 악화됩니다. 하지만 우울하고 병든 시기에 체코의 역사와 정신을 음악으로 표현한 그의 역작 <나의 조국>이 탄생합니다.
그가 교향시 <나의 조국>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오페라 <리부셰>를 완성한 직후입니다. <나의 조국>이라는 주제 아래 체코의 건국신화와 역사, 그리고 자연을 묘사한 총 6곡을 완성합니다. 그는 1874년 늦여름 제 1곡 <비셰흐라드>를 쓰기 시작합니다. 귀가 들리지 않아 모든 공식활동을 중단한 직후였죠. 당시 그의 나이 50세. 청력 이상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죽을 힘을 다해 써 내려갑니다. 결국 아주 미약한 음조차도 들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 2곡 <블타바>를 필사적으로 마무리했고, 제3곡부터는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작곡을 계속했습니다. 1879년 온갖 역경을 딛고 5년 만에 <나의 조국>을 완성해 프라하 시에 헌정합니다.
<나의 조국> 중에서도 유독 큰 사랑을 받는 음악은 두 번째 곡 <블타바>입니다. 이 음악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몰다우'라고 알려져있는데요. '몰다우'는 독일식 명칭입니다. 그러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은 체코인들에게는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죠. <블타바>는 플루트와 클라리넷으로 시작합니다. 작은 시냇물을 묘사하는 듯한 음악은 서서히 장대한 강물이 되어 일렁이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호른의 연주가 보헤미아의 숲에서 사냥이 펼쳐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폴카 리듬의 취한 선율이 시골 들판의 정겨운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이윽고 급류에 도달해 격하게 휘몰아치고, 다시 의기양양하게 연주되며 장엄하게 끝을 맺습니다.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짜내어 완성한 그의 애국헌정곡 <나의 조국>. 역작의 완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건강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됩니다. 결국 스메타나는 프라하의 한 정신병원에 맡겨지게 되었고, 1884년 5월 12일 그곳에서 숨을 거둡니다. 현재 그는 비셰흐라드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비세흐라드는 보헤미안의 정체성을 높여주는 민족의 성지입니다. 그곳에는 체코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화가, 음악가, 조각가 등이 묻혀있습니다.
스메타나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며 음악사에 길이 남은 명작 <나의 조국>은 지금도 매년 5월 12일에 열리는 프라하 봄 축제의 개막 공연에서 연주되고 있습니다. 1946년 종전의 기쁨과 함께 체코 필하모닉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며 시작된 프라하의 봄 축제. 당시 상임지휘자였던 라파엘 쿠벨릭이 흥분과 감격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힘차게 지휘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과 체코 국민들의 모습은 전 세계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그 축제를 아직 즐겨보지 못했습니다. 가이드를 하며 만난 여행객 중에는 이 축제의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예매하고 드레스를 준비해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클래식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부부였는데 아직까지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부러움과 아쉬움을 <블타바>를 들으며 강을 바라보는 걸로 달랬었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언젠가는 프라하의 5월을 온몸으로 느끼겠다는 것을 제 버킷리스트에 담아 두었죠.
음악의 힘은 대단합니다. 특히 여행을 할 때에 배가 되죠. 유럽에서의 여행은 인생에 다시없을 하루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감동으로 채우고 싶고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길 원하죠. 하지만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여행의 추억과 감정은 조각조각 나버리기 마련이죠. 그때 음악은 큰 힘을 발휘합니다. 여행하던 그때의 추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이어주는 하나의 큰 힘이 됩니다. 여행을 하며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는다면 그때의 그 감정과 이미지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프라하를 여행했을 때 체코 항공을 이용했는데, 프라하의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착륙할 때 비행기에서 체코의 음악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 흘러나왔어요. 그때 소름이 돋으면서 '아, 내가 프라하에 왔구나' 싶었죠. 그리고 그 음악을 제대로 듣고 싶어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밖으로 나가 스메타나 <나의 조국> 전곡이 들어 있는 CD를 샀어요. 이 곡은 딸아이가 클래식 중에서도 여전히 손꼽는 음악입니다.
박웅현 '여덟 단어' p82
'여덟 단어'의 저자 박웅현 씨는 공항에 착륙하는 항공기에서 이 음악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고 하죠. 저는 다른 공간에서 같은 소름을 느꼈습니다. Smetanovo nábřeží과 블타바 강이 맞닿아 있는 곳에는 위치한 스메타나 박물관(Muzeum Bedřicha Smetany)에서였습니다. 입장료 50kc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 곳에는 스메타나의 생애에 대한 자료들과 각종 악보 그리고 그가 사용했던 피아노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넓지 않은 공간 안에 그의 역사를 증명하는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져 있죠. 그리고 <나의 조국>이 오디오를 타고 흘러나옵니다. 저는 그곳에 창문 사이로 보이는 강의 전경을 바라보며 듣는 <블타바>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프라하에 도착했다면 블타바 강을 바라보며 <나의 조국> 중 <블타바>를 들어보는 기회를 놓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치 스메타나의 집에서 그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강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저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