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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빈 Dec 21. 2023

소설이 읽고 싶은 날들

소설이 읽고 싶다. 내 입에서 소설이 읽고 싶다는 말이 나오다니! 수많은 책들 중에 소설을 딱히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대단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건 몇 주 전 본 영화 <이퀄라이저> 때문이다. 맥콜 씨가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0권을 읽지만 않았어도, 난 소설을 가뭄에 콩 나듯 읽어온 대로 있었을 텐데. 또 요즘 들어 일 때문에 책을 보지 못한 이유도 있다. 따뜻한 차 한 잔에 달콤 짭짤한 디저트를 곁들여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는 순간이 그렇게 고플 수가 없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손에 들린 책은 늘 읽어오던 논픽션보다 픽션이 잘 어울릴 것만 같아서, 소설 읽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져버렸다.


가뭄에 콩 나듯 읽는 소설이지만 소설을 아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에 비할 수는 없어도 나름대로 고전 소설부터 현대 소설, 또 장르별 소설을 읽어온 기억이 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밤을 새우며 읽은 기억, 내용이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해설서와 동명의 옛 흑백 영화까지 섭렵한 기억, 여운이 가시질 않아 읽은 것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 이야기가 마음 아파 눈물 흘린 기억, 이름이 너무 긴 등장인물 때문에 매번 누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던 기억, 나와 정반대 성향의 인물 때문에 읽기 힘들었던 기억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소설로 인한 가지각색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만큼 글로써 완전히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수 있는 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또 소설이 해내는 일들을 대단하게 여긴다. 그런데도 내 독서 목록에 소설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은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단지 다른 세계에 가는 것(픽션)보다 그 세계를 창조한 사람(논픽션)에 더 관심이 가서 그렇다. 예컨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보다 그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대담집에 더 관심이 가고, 헤르만 헤세의 소설보다 그의 삶을 보여주는 에세이에 더 관심이 가는 식인 것이다. 작가를 말해주는 것은 단연 작품일 텐데, 창작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까? 나는 무대보다 무대 뒤(behind the scenes)가 궁금해지고 만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 내게도 소설이 읽고 싶어지는 날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로 느꼈던 감정과 경험을 곰곰이 곱씹어 보니 지금 나는 훌쩍 떠나고픈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잠시나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거나 그 세계의 누군가를 만나는 경험이 고픈 것이다. 번쩍이게 지나가는 영상이 아닌 글로써 느릿하게 집중해서 펼쳐가는 모험이.


가끔은 형체 없는 환상에 젖어도 좋을 테지. 앞으로는 드물게 했던 모험을 좀 더 즐겨보자며, 책장에 묵혀있던 소설들을 살펴보게 되는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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