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장소
내게는 나만의 바다가 있다. 일명 ‘비밀 바다’이다.
내 평생에 이런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기억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시절부터 늘 수도권 내륙에만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여행이나 휴가처럼 특별한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모를 일인지, 몇 년 전 아빠가 직장을 옮기면서 가족들 모두 남부지방의 바다가 보이는 섬 동네로 내려오게 되었고 신비롭기만 하던 바다는 나의 일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사 온 뒤로 외출할 때면 늘 여행 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늘을 닮은 푸른 바다와 공기 중 맡아지는 짭조름한 내음, 물양장에 정박한 배, 계절마다 관광으로 활기가 도는 지역 분위기, 사방에서 들려오는 꼬부랑 사투리. 이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여행의 착각을 배가시키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곧은 말씨를 쓰는 나였다. 나는 어디를 가든 입만 열면 이방인의 기운을 폴폴 풍겼다. 덕분에 카페나 식당에 갈 때도, 택시를 탈 때도 주민이 아닌 여행객으로 오해를 받았다. ‘어디서 오셨어요?’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같은 질문은 꽤 자주 듣는 말이었다. 뭐, 실제로 늘 여행하는 기분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터라 그 오해는 오해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여하튼 나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이 될 때면 지역 이곳저곳을 여행하듯 구경하며 다녔고 조금씩 새 동네를 익혀가며 정을 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문득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의 비밀 바다를!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곳은 내가 사는 섬 안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가 되었고 친구들이 놀러 올 때면 깜짝선물처럼 보여주는 풍경이 되었으며 제발 유명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곳이 되었다.
사실 이 섬에서 그 바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곳에 ‘비밀 바다’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첫째로 인기가 별로 없기 때문이고 (앞으로도 없길 바란다) 둘째로 모두가 바삐 갈 길 가느라 지나치기 딱 좋은 도로 옆 작은 전망대 아래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날 보러 놀러 온 친구에게 비밀 바다를 소개하고 거기서 같이 피크닉을 할 요량으로 택시를 불렀다. 비밀 바다에 가려면 일단 전망대에 도착해야 하므로 목적지는 ‘도로 옆 지나치기 딱 좋은 전망대’로 설정해 두고 말이다. 그런데 택시 기사님 눈엔 보통 사람들이 목적지로 설정하지 않을 애매한 곳에 뭔가 바리바리 싸 들고 놀러 가는 듯 보이는 젊은 처자들이 매우 희한해 보였던 것 같다.
“아니, 다른 좋은 곳 말고 왜 여기를 가요?”
하며 뒷자리의 우리에게 순수한 궁금증 가득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하긴 우리가 내릴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떡하니 이 동네 여행 명소로 뜨고 있는 마을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 마을의 인기가 높아져 갔기 때문에 보통 여행객들은 그 마을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곤 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마을을 지나쳐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웬 도로 옆 작은 전망대에 가는 것이었으니, 기사님은 궁금증이 일만도 했다.
이외에도 비밀 바다를 찾아갈 때면 ‘여기 말고 다른 데 더 좋은 곳 많다’며 이 지역 여행의 참맛을 모르는 것 같아 아쉬워하는 기사님이 있었는가 하면 ‘목적지가 희한하다’는 이유로 택시 콜을 수락하신 기사님도 있었다. 심지어는 비밀 바다 근처의 유일한 편의시설인 촌스러운 간판의 매점 아주머니마저 왜 이곳에 놀러 왔는지 안타까운 듯 의아해하는 반응을 보여서 나와 친구의 웃음을 자아낸 적도 있다.
그만큼 나의 비밀 바다가 놀러 갈 곳으로는 매력이 없어 보이나 보다. 눈을 사로잡는 예쁜 인테리어의 가게,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를 파는 카페, 구색이 갖춰진 포토스팟 하나 없는 곳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비밀 바다만큼 특별한 곳도 없다고 여긴다. 사람 손길이 별로 닿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인 이곳은 투박하고 심심한 듯 보여도 다른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바다는 따로 목적하지 않는 한 자기 길에서 잠시 한눈을 팔 수 있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으며, 잠시 한눈을 판다고 해도 호기심과 모험심이 있는 사람만이 바다의 아름다움을 면면이 누릴 수 있는 흥미로운 곳이다.
자, 지금부터 상상해 보길 바란다.
차를 타고 도로를 쌩쌩 달리다가 갑자기 오른편에 작은 전망대가 눈에 걸린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다면 지나칠 뻔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차선을 변경한다. 작지만 풍경이 잘 보일 것 같다는 기대감을 안고 주차한 뒤 전망대를 향한다. 전망대 안쪽으로 들어서니 차를 타고 오며 대충 봤던 푸른 바다가 탁 트여서 눈앞에 반짝거린다. 저 멀리 흐릿하게 몇몇 섬도 보이고 배도 떠 있다. 숨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하늘과 그 원경을 실컷 눈에 담는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니 성냥개비보다도 작은 사람들이 하나둘 바닷가를 거닐고 있다. 두리번거리다 전망대 왼편의 계단을 발견한다. 가파르고 좁지만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계단을 내려간다. 내려가며 위에선 실감할 수 없던 멋들어지게 자라난 소나무 자태에 감탄한다. 다시 앞을 보니 기다란 소나무 사이에 그림처럼 바다가 걸려 있다. 내가 원래 가야 했던 길은 잊어버린 채, 홀린 듯이 굽이굽이 계단을 따라간다. 조심한다고 발만 보다가 시선을 올리니 바다는 조금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깝고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두근거림으로 그렇게 계속 바다를 향해 내려간다. 어느새 시원하게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나무와 해안을 둘러싼 바위의 늠름한 기세를 느끼며 바다 가까이 도착한다. 발끝에 회갈색의 모난 자갈들이 차인다. 밀려온 파도가 쏴아아— 하며 자갈 사이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린다. 비틀비틀 걸음을 내디뎌 파도가 철썩이는 곳으로 간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는 동시에 내 시선 높이에서 물결이 찰랑인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듯한 긴장감으로 바다 앞에 선다. 쪼그려 앉아 나를 잡으러 오는 차갑고 투명한 바닷물에 손을 내어준다.
일어나 주위를 돌아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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