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낙원
며칠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 어딘가가 산만해지곤 한다. 말하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거리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글을 쓰고 싶어서 마음이 들썩이는 경우는 자주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 속에 있는 것을 글로 마구 뱉어내고 싶어질 때, 나는 나만의 낙원을 찾는다. 텅 빈 곳에 깜빡이는 텍스트 커서가 있는 곳. 아무것도 없지만 신기하게 모든 것이 충족되는 듯한 하얀 그곳이 바로 나의 낙원이다.
본디 낙원이란 괴로움과 고통이 없는 곳을 말한다. 그러나 나의 낙원에는 기쁨과 즐거움 외에 부끄러움, 외로움, 분노, 질투와 슬픔까지 모두 존재한다. 다시 말해 나의 낙원은 좋고 나쁜 생각과 감정들이 모두 용인되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낙원이라기보다 잡다한 것이 뒤섞인 창고 같기도 한데, 엉망진창인 나를 솔직하게 꺼내 보일 수 있고 용서할 힘과 용기가 생기는 그 하얀 공간이 낙원이 아니면 무얼까 생각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시끄럽고 질척이는 내면이 펼쳐지는 나의 낙원이 성스러운 공간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역설적으로 유독 나 자신이 미워져서 꼴도 보기 싫은 날이나 우울하고 좋지 않은 감정이 계속되는 때, 즉 스스로가 더욱 어두운 구석으로 빠질 때가 그런 경우이다.
못난 스스로를 마주하는 게 싫어 회피하면 할수록 곧 알게 된다. 하얀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도망치는 내가 자기에게 돌아와 말하기를,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그 말 듣기를 기다리고 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나는 하얀 공간 앞에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하나둘 깊은 내면을 토해낸다. 그러고 나면 거기 쓰인 말들이 되려 나를 꼭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얀 공간의 힘은 머리도 마음도 정리되지 않을 때 더욱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빈 곳에 띄엄띄엄 아무 말이나 써 내려가다 보면 비로소 정리되지 않은 것들의 형체—생각이든 감정이든—가 보이는 듯하니 말이다. 간혹 그게 무엇인지 도저히 알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문장을 어떻게든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갈피를 잃은 마음은 하얀 공간에 쓰는 행위를 통해 안정을 찾는다. 마치 기도를 마친 듯 차분해지고 후련해진다고 할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공간에 있으면 시간의 축이 뒤얽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쓰는 여기 동시에 있다. 내가 사는 건 언제나 오늘이지만 이 공간 안의 기록은 오늘을 뛰어넘어 모든 시간 속의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얀 공간에서 자신에 대해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과거의 아픔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자리에서 씻겨나가는 경험이나 오늘 쓰인 이 순간의 감정이 내일을 달리 대하게 만드는 경험 말이다. 또 과거의 나에게 오늘의 내가 말을 건네고 그 말이 미래의 나에게 도달했음을 느낀 적이라던가, 내가 쓴 글 안에서 어제 보지 못한 것이 오늘 보이고 오늘 보이지 않던 것이 내일 보이는 경험을 한 적, 나의 바람이 마치 예언처럼 글 안에 담기고 실제로 일어난 경험을 한 적 등등…….
쓰인 모든 글은 사후적이지만 결코 사후적이지 않은 신비한 것임을 이 하얀 공간 안에서 깨닫게 된다.
나의 낙원. 그곳은 오늘도 어김없이 내가 찾아야 할 곳이자 어쩌면 평생토록 숨을 트일 곳인 것 같다. 그런데 참 다행이지. 내가 말한 텍스트 커서가 깜빡이는 하얀 공간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속에 있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하얀 공간은 카페의 냅킨일 수도 있고 가게에서 받은 영수증 뒤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군가 찢어준 종이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으로든 글을 쓸 수만 있다면, 나는 하얀 공간을 만들 수 있고 그곳을 낙원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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