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내게 사랑하는 계절이 있다면 당연히 겨울이다. 그건 내가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는 태생적인 이유를 떠나서 겨울이 보여주는 풍경만큼 시적으로 느껴지는 계절도 없기 때문이다. 내쉬는 숨이 형태를 가질 만큼 차가운 겨울은 작은 온기도 소중하게 느껴지게 한다. 겨울의 하늘은 성급하게 어두워지는 대신 유난히 깊고 고요하며, 겨울의 땅은 헐벗었으나 거기엔 가장 단단한 자태를 자랑하는 나무들이 있다. 또 거리 곳곳은 반짝이는 빛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쓸쓸한 듯 황량한 가운데 묘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절만의 묘미는 따로 있는데, 바로 때때로 온 세상이 하얗게 옷을 입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겨울의 모습을 하나씩 헤아리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1995년도에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러브레터〉(한국 개봉 1999)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이던 그 시절 한여름. 한창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나는 후배이자 친구인 Q를 만나 카페에서 마스크를 쓴 채 한 자리씩 띄어 앉아 과제를 하고 있었다. Q는 강제적으로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시간을 달래기 위해 영화를 보고 있노라고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무더위 때문에 겨울이 너무나 그리운 지금 감상하기 딱 좋다며 〈러브레터〉를 언급했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데다 주기적으로 보는 영화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때의 내가 〈러브레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영화 속 여주인공이 하얀 설원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고
“お元気ですか。
오겡끼데스까! (잘 지내나요)
私は元気です。”
아따시와겡끼데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하고 외치는 장면뿐이었다.
내가 〈러브레터〉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Q가 말했다.
“혜빈이라면 무조건 봤을 줄 알았는데!”
(뒤이어 Q는 ‘오겡끼데스까’를 애절하게 외쳐댔다)
안타깝게도 나는 로맨스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Q의 반응, 즉 나를 아는 사람이 ‘무조건’ 봤을 것으로 생각할 만큼 나의 취향이라고 여긴 영화라는 점에서 〈러브레터〉는 마음 한구석을 차지했다.
각종 미디어에서 패러디가 많이 된 터라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그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가진 건지 제대로 알게 된 건 그로부터 2년 후의 겨울이었다. 졸업 후 나는 본가로 내려와 비교적 따뜻한 남부의 바다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몇 년째 눈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대한 그리움을 늘 가득 안고 있던 그때 내가 비로소 Q의 말을 떠올려 〈러브레터〉를 찾아본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눈이 오는 풍경을 마음껏 봐서 좋은 것보다도 시린 마음이 견딜 수 없었다. 하얀 눈이 휘날리는 설원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마음이, 몰랐던 사랑을 깨달았지만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마음이 너무도 사무쳤다. 내가 우습게 알고 있던 ‘오겡끼데스까’는 주인공 히로코의, 이츠키의 가슴 절절한 작별 인사였다. 왜 이 영화를 지금에야 봤는지! 더 빨리 보지 못했음에 안타까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적절하고도 절묘한 시점에 만난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가 주는 의미를 깊이 음미할 수 있을 때, 마침 작중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에, 영화와는 반대로 겨울 눈이 희귀한 곳에서 이 영화를 처음으로 감상하게 됐다는 사실이 말이다.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작별’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작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 또는 그 인사’라고 한다. 인사 없이 떠나간 사람(이츠키男), 그와 제대로 마주하고 작별하는 사람(히로코, 이츠키女)의 이야기가 바로 〈러브레터〉인 것이다.
다른 한편, 상상의 나래를 펼쳐 이 영화를 설명할 또 다른 단어를 하나 골라본다. 바로 영화 속에서 표현되지 않은 ‘만남’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들의 행적은 만남이라기보다 헤어짐이었고 그들 사이에 펼쳐진 계절은 혹독하리만치 차가운 겨울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작중 인물들의 삶에 새로운 만남이 피어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엇갈린 시간과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안은 모양이라 하더라도, 이 못 견디게 추운 겨울 뒤에 다가올 것은 따뜻한 봄뿐이니까.
〈러브레터〉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겨울이라는 배경과 시간이 필요했다고 여긴다. 작별, 그리고 만남. 이러한 이야기는 네 계절 중에 겨울만이,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성실하게 다음을 준비하는 계절만이 담을 수 있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겨울은 작년과 올해에 걸친 유일한 계절이면서 앞으로만 향해가는 시간을 순환적으로 묶는 경계에 자릴 잡고 있다. 끝, 그리고 시작. 이토록 시작과 끝이라는 순서를 거꾸로 말하기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아니, 정말로 겨울은 시작이자 끝이고 끝이자 시작이다.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입춘이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24 절기로 따지자면 벌써 겨울을 벗어나 봄의 안쪽으로 들어섰다고 해도 무방하다. 겨울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2월을 꼭 가득 채워 겨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2월은 겨울과 작별하는 시간이 맞는 것 같다. 그럼에도 영영 아쉬워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스미듯 이어질 봄과의 만남이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뭐라고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운 겨울 어디쯤 서 있는 지금.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마지막 인사에 덧붙여
“앞으로도 잘 지내기를 바라요.”
하고, 나는 첫인사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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